2008년 05월 07일
99년 세계 청소년 대표 근황
안홍찬, 박동혁, 이범직, 신동근, 송종국, 김건형, 전재호, 나희근, 서기복, 김경일, 설기현, 고봉현, 김은중, 서관수, 우진석, 이동국
99년 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 대회 본선에 출전한 필드 플레이어 명단인데 부상신이 쫌 사랑하신듯 합니다. -_-
안홍찬 : 성균관대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수비수로 기대 받았음. 졸업과 동시에 상무에 입단 (아직 상무 K리그 참여 전이었음)
2002년 FA컵 출전을 마지막으로 상무 퇴소 후 기록이 전무합니다. 따라서 프로 통산 기록도 전무 (...)
이범직 : 코너킥 상황에서 문전 헤딩슛으로 청소년대표 아시아 예선에서 2골을 기록하며 기대를 모았음.
대구대 졸업 후 부천에 입단했으나 대구대 재학시절 입은 무릎부상으로 인해 별 활약도 없이 방출. K리그 통산
출전 0경기 출장기록. 현재 K3 천안 FC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고 계십니다.
신동근 : 99 청대 선수단 중 최연소 선수이자 김경일 선수와 함께 초고교 유망주로 통했습니다. 졸업 후 연세대에 진학,
선배인 송종국과 함께 대학 무대를 평정해버렸지요. 전 연대 감독이었던 김호곤은 신동근의 기량을 극찬하며 히딩크에게 추천
아마추어 선수로 히딩크 호에 테스트 선수로 뽑혀 잠시 대표팀 선수와 함께 훈련한 경험도 있습니다.
03년 성남에 입단. 입단과 동시에 무릎 부상으로 독일에서 수술 후 1년간 재활치료. 05시즌 개막 직전,
이번에는 발목 부상을 입어 05시즌 1경기 출장에 그쳤고 06시즌 시즌 오프기간에 발가락 부상까지 당하며 한 때
방출설까지 나돌았으나 성남 2군서 계속 뛰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었죠. 현재는 광주 상무에 08시즌부터 입대한 상태이지만
상무에서도 선발 출장은 요원한 상황입니다. 성남에 돌아와도 자리가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김건형 : 99 청대에서 가장 유명한 골인 대 포르투갈 전 중거리 슈팅의 주인공. 캐논 슛터 노상래 이기형의 계보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경희대 졸업 후 00시즌 울산에 입단. 컵대회 개막전에서 전남을 상대로
역전골을 뽑아내는 등 데뷔 초 환상적인 기량을 뽐냈었지요. 여담으로 당시 컵대회 개막전에서 울산이 뽑아낸 4골 중 3골이
그 해 신인이었던 박규선, 최철우, 김건형이 득점해내며 당시 울산 감독이었던 고재욱 감독이 이번 시즌 신인은
정말 대어들만 물어왔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김건형 선수의 이 골은 울산에서의 첫골이자 동시에 마지막 골이 되버렸었죠.
데뷔 2년차, 발목 통증이 찾아와 검사를 받아보니 발목 복합 골절. 곧바로 수술과 재활에 들어갔으나 발목 연골이 기형적으로
손상돼 경기를 오래 뛸 수 없다는 선수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은 채 필드에 돌아와야했습니다. 결국 01시즌 1경기, 02시즌 2경기 교체 출장을 끝으로 울산에서 방출된 김건형 선수는 신생구단인 대구에 입단하며 많은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당시 암울했던 대구 공격진에 소금같은 존재로 아직도 대구팬들의 기억속에 남아있습니다. 결국 04시즌을 끝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 현재는
어디 마산인가?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으로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김경일 : 광양 제철고가 낳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대한민국 비운의 축구천재 계보를 작성하면 으레 반드시 포함되는 선수가 김경일 선수이지요. 96년 광양 제철고의 창단 멤버로 광양제철고 초대 감독이었던 기영옥 감독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광양 제철고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축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광양 제철고는 창단 2년만에 97,98 2년 연속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데 고교 축구 인사들은 광양제철고 전력의 8할이 김경일 선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고 하네요.
당시 광양제철고 감독이셨던 기영옥 감독은 지금은 기성용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으시지만 당시에는 금호고 감독으로 윤정환, 고종수를 길러낸 전력이 있어 고교축구계의 마이다스 손으로 통하셨죠. 고교축구계에서는 기영옥 감독의 3번째 작품은 김경일 선수라고 입을 모았고 기영옥 감독 본인도 '고 3 시절 김경일 선수의 실력은 같은 나이때의 윤정환 고종수를 뛰어넘었었다.'고 회고할 만큼 김경일 선수의 천재성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당시 광양제철고 주전스트라이커는 김해출 선수였는데 이 선수는 96,97 2년 연속 이동국 선수와 고교 득점왕 경쟁을 벌일 정도로 잘 나갔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스카우터들의 평가는 냉정하기 그지 없어 '김경일 선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반쪽짜리 선수'라고 혹평했고 실제로도 전남에서 우선지명 형식으로 입단했으나 통산 정규리그 3경기 교체출장에 그치며 소리소문없이 방출, 은퇴해버렸습니다. 가끔 김해출 선수도 비운의 유망주로 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당시 김해출 선수의 플레이를 보신 분들의 말로는 그 정도로 평가를 받을 정도의 기량은 아니었고 김경일 선수의 후광을 입은 바가 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여하튼 초고교유망주로 통했던 김경일 선수는 99년 전남드래곤즈에 우선지명으로 입단, 계약금 및 연봉수당 등에서 98년 신인왕이었던 이동국 선수가 포항 입단할 때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화려하게 입단하게 됩니다. 그 정도로 김경일 선수에 거는 전남의 기대는 컸었지요. 겹경사로 청소년대표에서 김경일 선수를 호출하며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때부터 주전이었던 고 정용훈 선수를 밀어내고 99년 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본선행 최종 엔트리에 발탁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청소년대표 감독이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우승을 이뤘던 박창선 감독에서 조영증 감독으로 전격 교체되면서 김경일 선수가 조영증 감독이 구상했던 4-3-3 플랫의 구심점으로 점찍힌 것이었죠. 가끔 생각하는게 만약 고 정용훈 선수가 이때 청대 본선 최종 엔트리에 참가하고 베스트 일레븐으로 뛰며 슬럼프 없이 시드니 올대까지 순조롭게 발탁되었더라면 정용훈 선수가 이토록 빠르게 잊혀지고 있진 않을꺼라는 생각도 드네요. 여러모로 아쉬운 장면이에요 ;ㅅ;.
어찌되었든 99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가 개막하자 한국 언론은 '이번에야 말로 4강 신화 재현! -_-;;' 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김경일 선수에 대한 관심도 높았지요. 혜성처럼 등장해 조영증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당시 주장까지 맡았던걸로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특히 광양제철고에서의 활약을 자세히 소개하며 '윤정환의 패스와 서정원의 활동량이었던가요 'ㅅ'?' 아무튼 별의별 호칭이 다 갖다붙이며 김경일 선수에게 기대를 모았지요. 그리하여 세계 청소년 대회 본선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만.. 문제는 플레이가 기대 이하였다는거였지요.. -_-
조영증 감독은 김경일 선수에게서 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의 윤정환과 같은 플레이메이커의 전진패스를 바랬던 것 같지만 포르투갈 우루과이 선수들의 압박과 볼경합에서 맥없이 무너지며 장기인 전진 패스 시도 조차 여의치 않았습니다. 종국에는 한국 수비수들이 김경일 선수를 무시하고 공격진에 롱패스를 지르는 소위 뻥축구로 전락하며 한국 청대는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해버렸지요. 여기에는 조영증 감독의 선발진 구성 미스와 당시로서는 생소한 전술이었던 4-3-3 전술을 3-5-2에 익숙해있던 한국 청대 선수에게 적용했던 실책도 한 몫했습니다. 98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 당시 대한민국 청대가 3-5-2 전술로 우승했던 것이었으니까요. 다행히 마지막 말리전에서 4:2로 승리하며 체면치레는 했지만 같은 대회에서 일본 청대는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축구팬들은 절망할 수 밖에 없었지요 특히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결승에서 한국 청대가 일본 청대를 2:1로 격파한지 1년도 채 안되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했습니다. 결국 99 청대의 참담한 실패에 대한 비난은 조영증 감독과 김경일 선수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죠.
하지만 조영증 감독은 김경일 선수를 지칭하며 '이제 국제경험도 쌓았으니 더욱 성장할 것이다.'라고 따로 언급할 정도로 김경일 선수의 미래는 밝아보였습니다. 99시즌 개막되기 전부터 공공연히 올해의 신인왕은 김경일이 따놓은 당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K리그 팬들도 김경일에 대한 기대가 컸었죠. 그러나 정규리그 3경기 출장만에 새끼발가락 피로골절 판정을 받으며 최소 6개월은 쉬어야한다는 진단을 받으며 사실상의 시즌아웃.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있었던 것 같았던 김경일 선수의 인생에 부상신의 악령이 이때부터 머물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김경일 선수도 젊은 혈기에 부상이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3개월만에 필드에 다시 섰다가 시즌 아웃뿐만아니라 이듬해인 00시즌까지 무출장에 그치고 말았지요.
그렇게 2년이 흘러 01시즌 대 안양전에서 오랜만에 전남 선수로 나섰지만 역시 1경기만에 무릎 통증으로 인해 진단을 받고 구단의 배려로 독일로 수술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재활 도중 또다시 찾아온 무릎통증으로 이번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수술 또 수술 ..... 결국 02.03시즌까지 무출장에 그치며 김경일 선수의 이름은 팬들의 머릿속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몸이 나아져서 훈련을 받다보면 무릎 관절이 계속 탈골 되버렸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경험이었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04시즌 전남에서 방출 통보 후 대구에 입단했지만 박종환 감독께서는 '어떻게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가 있느냐!?'며 안타까워 하셨다고 하네요. 결국 05시즌 선수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와 함께 은퇴하게 됩니다. 무릎이 자꾸 탈골된 이유가 선천적으로 무릎뼈의 바깥부분이 함몰돼 있는 기형이라 애시당초 축구화를 신어선 안되는 운명이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단과 함께 말이지요... ㅜㅜ..
그렇게 김경일 선수는 사라졌고 가장 최근 김경일 선수에 대한 소식은 축구교실을 열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덧붙여 인천의 윤원일 선수 였나요. 그 선수 인터뷰 기사에서 지나가는 말로 김경일 선수에 관해 언급한 구절이 있더군요.
'제 축구 인생에서 제일 볼 잘 차는 선수를 꼽으라면 주저않고 김경일 선수에요. 정말 볼을 잘 찼죠. 근데 계속 부상.. 재활 다시 부상.. 필드에 서있는 시간보다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요. 김경일 선수를 보며 실력이 있어도 프로로 성공할 수 없는 경우도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었습니다.'
이제는 축구교실을 열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김경일 힘든 과거를 보내신 만큼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생기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음.. 나희근 선수에 관해 써뒀던 것도 있었는데 날아가버렸네요 ;ㅅ;.. 일단 여기까지만 쓰고 올려봅니다.
# by | 2008/05/07 23:34 | K리그에 관련된건 뭐든지 | 트랙백 | 덧글(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근데 와서 보니 한참전에 구독기에 추가시킨 블로그더라는..^^
항상 글을 보기만 했지 저 스스로 댓글이라는 것에 상당히 인색했던 것 같네요.
잘봤습니다.
99년 청소년대표는 제기억에도 강렬한 인상이 있는 팀이지요.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제 블로그의 윤정환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적었지만...이미 이때 플레이메이커는 몸싸움을 벌이지 못하면 낙오되는 것으로 추세가 바뀐지도 한참 뒤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정용훈이 딱이었는데 왜 뺐는지 이해가 안갔습니다. 포멧 변경도 원인중 하나고...
나중에 알고보니 정용훈선수가 그때 숙소에 여자 델구와서 걸린것이었다더군요...
김경일의 경우 중-고때 그렇게 고평가 받을수 있었던 것이 어찌 보면 국내 학원축구의 수비부재라는 것도 한몫한다고 봐야죠.
그 바람에 공격지향적인 선수들의 평가가 고평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 데뷔전에서는 '어? 좀 하는거 같은데?' 하고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만, 뭐랄까 과감성이 떨어지는 면이 보이긴 하더군요. 아마 선배에게 주눅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하다보면 한국에서의 '학원축구'라는 것의 병폐가 자꾸 떠오르게 되는군요.
완전한 부상치료를 못하게 한다는 것 하고 서열로 잡혀버려서 신인들이 기량보다는 깡(이것도 기량중 하나이지만...)이 없으면 그냥 끝나는...
그런 풍토가 언제쯤 바뀔수 있을런지...허허
패배주의는 그대부터 싹텄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