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1월 06일
부산's 레젼드 part 06.감독이기 이전에 그는 선수. 장외룡 (83~86)
장외룡 선수 시절 사진 한 장 없다니 ㅜㅡㅜ
이름 : 장외룡
생년월일 : 59년 4월 5일
학력 : 연세대 졸업
포지션 : DF
K리그 통산 기록 : 77경기 2도움
부산 통산 기록 : 위와 동일
국가대표 기록 : 축협에 업데이트가 안돼있음. 하지만 80년 아시안컵, 82 아시안게임등에서 주전 수비수로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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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룡씨는 감독으로서의 명성에 비해 선수 시절 자료가 정말 적습니다. 따라서 이 글도 내용이 앞선 연작물에 비해서는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 특히 홍차도둑님 (;ㅅ;)의 고견이 절실합니다. 궁금한건 많은데 자료가 없어요.. 최순호, 차범근, 변병주, 허정무 같은 스타 출신 감독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였는데 이렇게도 자료가 없다니 ㅡㅡa 역시 80년대 한국축구에서 수비수는 스폿라이트를 받기 힘들었겠지요. 뭐 어쨋든 제가 수집한 범위내에서 얘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외룡 선수의 이야기는 78년 방글라데시에서 열렸던 U-19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대회 본선 조별예선에서 화제의 팀은 단연 북한 청소년 대표였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과 같은 조편성이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스리랑카, 인도 였는데요. 북한은 이들을 상대로 사우디하고만 1:1로 비기고 모두 이겨버리며 B조 1위로 8강행을 확정지었던 것이죠. 북한과 사우디에 밀린 일본은 3위로 조별 예선 탈락 ㅡㅡa 한국이 속해있던 D조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한국으로 구성돼있었는데요. 북한의 승승장구에 고무(?)된 한국대표팀은 역시 이란과 1:1로 비기고 잔여팀을 이기며 본선 1위로 8강에 진출하게됩니다.
그리고 8강전 역시 북한은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한국은 바레인을 상대로 각각 승리를 거두며 4강전에 진출. 그리고 운명의 남북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한 VS 북한의 라이벌 의식은 말 안해도 잘 아실껍니다. 체제 경쟁에서 파생된 라이벌 의식은 스포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죠. 예외이긴 커녕 오히려 더 불타올랐습니다. 유명한 66년 북한 축구의 8강 신화에 맟서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나서 양지팀을 창설해 군미필 축구선수들을 강제로 입단시켜 훈련시킨 일화는 유명하고요. 70년대 들어서는 72년 뮌헨 올림픽 북한 사격 금메달 리스트였던 이호준 선수의 인터뷰 한마디 '원수의 가슴을 쏘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나섰다' ;;; 이 발언을 듣고 기겁한 박통 정부는 스포츠 전반에 대한 투자를 확충하게 됩니다. 목표는 '북한보다 우월한 스포츠 역량을 세계에 보여주자!'는 것이었죠... 그렇게 스포츠가 체제우월의 도구로 이용되는 시대였던 78년 드디어(?) 남북 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경기였는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그렇게 벌어진 4강전. 지면 고국 땅 못 밟는다(?)는 각오로 죽기살기로 뛰니 양팀 접전에 접전, 결국 0:0으로 전후반을 마무리하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게됩니다. 이태호 선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대표는 말이 청소년이지 실제로는 나이를 속인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당시 키커 명단은 당연하게도(?) 남아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있더군요. 전적으로 후추의 이재영님의 기억에 의거한 자료를 퍼온 것임을 미리 명시를 해둡니다.
-78년 방글라데시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4강전 남한VS북한 PK 남한 키커-
1번 주장 박항서 ( 당시 한양대 )
2번 김창효 ( 당시 부산상고 )
3번 왕선재 ( 당시 동아고 )
4번 정해원 ( 당시 안양공고 )
5번 장외룡 ( 당시 연세대 )
6번 이태호 ( 당시 대전상고 )
여기서 5번 키커가 장외룡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장외룡 선수까지 남북 키커 10명 모두 골을 성공시켰었죠. 그런데 북한대표 6번 키커였던 나봉기 선수의 슈팅이 남한 골킵 박영수 선수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태호 선수가 6번 키커로 나서 마무리를 장식하며 6:5의 PK 승부로 한국이 결승에 진출하게 됩니다. 나봉기 선수는 북한으로 무사히 돌아갔을까요? ㅡㅡa
북한을 꺽고 오른 결승에서 이라크와 1:1 무승부로 공동우승을 달성하며 돌아온 한국 청소년 대표는 남북대결을 승리로 장식했기에 더많은 조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거기다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우승한게 16년만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듬해 79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 참가한 한국 청대 명단에 78년 대회 우승 멤버의 상당수가 제외된 것이 눈에 띄더군요. 골키퍼도 박영수 선수가 아닌 오연교 선수로 대체되었고요. 장외룡 선수도 마찬가지로 엔트리에서 탈락, 주장인 박항서나 왕선재 정해원 선수도 포함되지 않은 말그대로 차떼고 포까지 떼버린 구성으로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나갔었더군요. 왜 그랬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청대 핵심 멤버들을 국가대표로 바로 승격 시키기라도 한 것 일까요?
어쨋든 79년 열린 연고전에서부터 장외룡 선수 얘기를 해야겠네요. 당시 연고전은 78년 아시아 청대 우승 멤버들이 대거 연대와 고대로 입학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여느 때보다 더 높았습니다. 축구인들의 관심도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이듬해 열릴 80년 아시안컵과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 준비를 위한 국가대표 상비군의 기량 점검을 위해 감독의 눈은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연세대 수비의 핵심은 연대 주장이기도 했던 이장수 선수였습니다. 당시 국가대표 수비수로 발탁된 검증된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연고전에서 이장수 선수가 고려대의 이상용 선수에게 말그대로 썰립니다. 이상용 선수가 당시 79년 세계 청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지 1달정도밖에 안된데다 1학년이었는데 이장수 선수가 이상용 선수 마크도 제대로 못하고 유린당하고 말았던 것이죠. 거기다가 이 경기에서 고대와 연대 선수간에 패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주장으로써 선수단 컨트롤을 제대로 못한 것도 이장수 선수에게는 마이너스였죠. 물론 싸움은 고려대가 걸었다지만 (싸움의 시작은 이태호 선수였답니다.)
결국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이장수 선수는 이듬해 80년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이장수 선수의 빈자리를 그대로 메운 선수가 다름아닌 장외룡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국가대표가 되었다고 해도 수비수 장외룡 선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일천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기록이 없지요 ㅡㅡa
어쨋든 장외룡 선수 얘기가 또 등장하는 부분은 앞서 정해원 선수 편에서 길게 얘기했던 80년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벌어진 남북대결에서 였습니다. 정해원 선수의 헤딩 만회골 득점으로 1:1 상황 후반 종료 직전, 장외룡 선수의 드로인이 시발점이 되어 이강조->이영무->정해원->골! 을 만들어낸 것이죠. 이후로 장외룡 선수의 국가대표 활약상에서 드로인 능력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본선행을 위한 예선전 대 중국전에서 장외룡 선수가 득점을 성공하며 2:2 무승부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장외룡 선수에 대한 기록은 이 정도 밖에 없어요 ㅜㅡㅜ 82년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 장외룡 선수가 참가했다는 기록은 본 것 같은데 따로 장외룡 선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OTL//
어찌되었든 연세대를 졸업한 장외룡 선수는 83년 대우로얄즈의 원년멤버로 입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83 K리그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수비수 부문에 선정되죠. 당시 장외룡 선수에 대한 평가는 '태클을 예쁘게 할 줄 아는 선수' 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태클은 공을 노리고 하는 것이지 선수를 겨냥해선 안되지요. 선수를 겨냥했다간 여지없이 파울 휘슬이 울립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죠 .. 그런데 장외룡 선수의 태클은 매번 상대 선수의 볼만 얌전하게 가로채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클을 예쁘게 한다는 평을 들었다고 하네요.
84년 대우로얄즈 우승 당시 장외룡 선수는 18경기 출장이었습니다. 특기할만한 건 선수시절 유일한 퇴장이 이 때 1번 있었다는 점이죠.
85년 K리그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수비수 부문에 장외룡 선수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장외룡 선수가 당시 리그에서의 활약에 비해 국가대표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80년대 초 국가대표로 자주 차출됐었던 것과 달리 이즈음에는 장외룡 선수가 국가대표로 차출돼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장외룡 선수의 주포지션인 레프트 풀백에는 주로 김평석 선수가 출장하곤 했으니까요. 왜그랬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제 추측이지만 장외룡 선수는 수비 능력은 최상이지만 당시 사이드 풀백에게 본격적으로 요구돼고 있었던 오버래핑 능력이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장외룡 선수가 86시즌까지 활발하게 출장을 해오다 그토록 갑작스럽고도 이른 나이에(29살) 은퇴를 결정했는지에 관한 미스테리의 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시 한국 국가대표 사이드 풀백을 전담했던 박경훈 선수가 한국 축구 오버래핑의 창시자라고 불리면서 오버래핑 붐을 일으키자 국가대표 사이드 풀백뿐만 아니라 K리그에서도 오버래핑에 대한 선호도가 증폭되게 됩니다. 특히 대우로얄즈의 초대 감독이셨던 장운수 감독님은 수비진이 수비에만 집중해 안정감을 불어넣으면서 공격을 전개하는 스타일이셨다면 87년부터 대우로얄즈를 맡으신 이차만 감독님은 양 사이드의 활발한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진에 활력을 불어넣는 전술을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건 장외룡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전술적 변화였겠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87년 장외룡 선수는 일찍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기 때문에 틀릴 수 도 있지만 제가 볼때는 이것말고는 딱히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할 이유가 없어보이네요. 찾아봐도 기록도 없고 ㅡㅡa 어쨋거나 장외룡 선수에 대한 부족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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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얘기는 말해봐야 손만 아플뿐이죠 ㅡㅡa 다만 은퇴 후 88년부터 1년동안 아주대 감독으로 재직하시다 이듬해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코치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by | 2008/01/06 10:37 | 부산's 레젼드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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