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2일
부산 Forever no.16 김주성 !!!!!

간지나셨던 삼손머리로 뛰는 부산시절 사진이 안보여요 ㅜㅡㅜ
성명 : 김주성
생년월일 : 66년 1월 17일 생
학력 : 조선대 졸업
포지션 : FW, MF, DF
K리그 통산 기록 : 255경기 출전 35골 17도움
부산 통산 기록 : 위와 동일
국가대표 통산 기록 : 76경기 출전 13골
○ 주요 기록
너무 많아서 다 써넣기도 벅차네요..
85년 1월 1일 부산에서 열린 88팀 VS 86 월드컵대표팀 친선경기에서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음.
85년 7월 21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인도네시아 전에 후반 교체 출장으로 첫 A매치 출장. 그 경기에서 데뷔골 작렬!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참가. 본선 3경기 모두 출전
87년 대우로얄즈 입단. 그해 대우로얄즈 우승. K리그 신인왕 수상,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공격수 부문 선정.
이후 왠만한 국가대표 경기에는 모두 참가하며 AFC 선정 올해의 선수 89,90,91 3년 연속 선정되는 대기록 작성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참가. 본선 3경기 모두 출전
91년 부산대우로얄즈 우승. 91 K리그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미드필더 부문 선정.
92년 7월 VFB 보쿰으로 임대계약 형식으로 입단
94년 미국월드컵 본선 참가. 본선 3경기 모두 출장
94년 말 부산으로 복귀. 수비수로 포지션 전환
97년 부산로얄즈 우승. MVP 수상. 97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수비수 부문 선정.
99년 현역 은퇴 ㅜㅡㅜ 국내 최초 프로 선수로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내 최초 현역 은퇴 경기를 개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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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부산의 전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지나간 세월을 더듬으며 환희에 젖는 부산의 명실상부한 TOP 레젼드 김주성 선수입니다. 원래는 레젼드 소개 코너 막판에 가서나 김주성 선수를 쓰려고 했는데 김주성 선수를 써달라는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김주성 선수에 대한 얘기를 조금 일찍 꺼내봤습니다. 위의 주요기록 정리하는 것도 앞선 2명의 선수보다 갑절은 시간이 걸렸네요 ;; 뒤에 이어지는 내용도 장문의 스크롤 압박이 예상됩니다 ....;;
김주성 선수에 대한 기억은 우선 99년 현역 은퇴 경기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은퇴 경기를 하실 때 '왜 부산에서 안하고 속초에서 하는걸까?' 하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은퇴 경기를 하신 날이 99시즌 오프 후 11월 겨울이었죠. 당시 프로축구연맹에서 프로축구 올스타 VS 김주성's 올스타로 속초에서 경기를 성사시키며 김주성 선수에게 공로패도 전달하고 대단히 훈훈한 분위기에서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한 선수의 은퇴를 기념 경기가 이루어졌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김주성 선수 고향이 강원도 양양군이시더군요. 게다가 축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속초 중앙 초등학교부터 이셨다고 하니 김주성 선수에게 속초는 은퇴 경기를 열기에 최적인 남다른 의미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김주성 선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축구부에 입단하고 축구에 인생을 걸기로 한 시기이지요.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김주성 선수는 그저 평범한 축구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5년 후에 대한민국의 왠만한 사람 모두 김주성 선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 ;;
중학교 졸업 후 김주성 선수를 받아준 학교는 중앙고등학교 였습니다. 축구로 전국에서 꽤나 이름날리는 학교는 결코 아니었죠. 하지만 김주성 선수가 입학한 첫해에 중앙고등학교는 전국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김주성 선수는 고교 상비군 (앞서 얘기해본 김풍주 선수도 고교 상비군 이셨더군요.)에 발탁되며 뒷날 화려한 도약을 예고합니다.
고교 상비군이란 당시 교육부에서 고교 축구 선수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 낙오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아 만든 제도였다고 하네요. 즉 고교 상비군이란 명단을 짜놓고 거기에 이름을 올린 고교 선수는 각 대학교 축구부에서 무조건 입학허가를 내줘야만 하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고려대나 연세대같은 명문 축구부는 특급 고교 에이스로 활약하는 알짜배기 선수들만 쏙쏙 빼갔기에 고교 상비군에만 이름을 올리는 선수는 대체로 하위권 대학 축구부에만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김주성 선수는 그리하여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조선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고교 졸업 당시 포항제철 등에서 입단 제의가 있었지만 고등학교 감독의 권유로 (조선대에서는 김주성 선수 입학을 조건으로 다른 2명의 중앙고 축구선수의 입학을 허락했었다고 하네요. 일종의 끼워팔기 ;ㅅ;) 조선대에 입학했던 것이죠. 그 후 조선대 2학년 재학 중에 당시 청소년대표팀 감독이셨던 김삼락 감독의 눈에 김주성 선수가 포착됩니다. 그리고 청대 발탁 후 축구인들 사이에 김주성 선수에 대한 입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하네요. 김주성 선수의 화려한 데뷔를 위한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드디어 김주성 선수를 당시 88올림픽대표팀 양성에 매진하던 박종환 감독이 파격적으로 발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85년 1월 1일. 당시 친선경기격인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에 86 멕시코 월드컵을 위한 월드컵 대표팀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한 88팀이 출전하여 부산에서 경기를 벌이게 됩니다. 당시 86 월드컵 대표팀에는 정용환, 박경훈, 허정무, 박창선, 변병주, 최순호 등 불세출의 대 스타급 선수들로 화려하게 구성되어있었고 88팀은 그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 선수들이었겠죠 ;ㅅ; 부산에서 경기가 열렸을 때 관중들은 88팀을 응원했다고 하네요.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워낙 멤버진에서 게임이 안될 것 처럼 보였을테니깐요. 그런데 여기서 김주성 선수가 그야말로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줍니다. 대선배인 센터백 정용환 풀백 박경훈 선수를 중심으로 뭉친 지금 봐도 후덜덜한 수비진을 끊임없이 파고들더니만 막바지에는 중거리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88팀의 2:1승리의 주인공이 됩니다. 당시 언론사 및 축구인들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직감했고 그것은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86 월드컵 대표팀은 김주성 선수를 차출합니다. 그리고 7월 인도네시아전에서 후반전 선발이었던 김석원 선수가 부상으로 아웃되자 교체 투입돼 첫 A매치 출전 그리고 곧바로 첫 A매치 골을 작성합니다. 축구의 신이 김주성 선수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김주성 선수는 언제나 그 기회를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가장 멋진 활약으로 보답해냈다고 표현하고 싶군요. 정말 멋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안 떠오르는.. ;ㅅ; 게다가 김석원 선수가 인도네시아 전 부상으로 대표팀 잔여 경기를 뛸 수 없게되자 그 이후부터 국대 붙박이 왼쪽 윙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것은 86 월드컵 본선에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당시 김주성 선수는 19살, 사실상 대표팀 막내이자 최종 엔트리 막차에 뛰어 올라탄 그런 선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성 선수는 86월드컵 본선 3경기를 모두 소화해버립니다. 이런 케이스는 정말 보기드물죠. 김주성 선수의 등장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가 또 김주성 선수같은 플레이어가 나타나길 한국축구가 얼마나 기다려왔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거기다 선정 주체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후 90년 월드컵을 빛낼 예비스타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뭐 그렇다해도 당시 86 월드컵 대표 멤버는 정말 전설적인 선수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던데 비해서는 너무 성적이 저조했죠. 당시 사람들 분위기는 잘만하면 8강도 가능하다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무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불가리아라는 괴수팀 대모음집스러운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는데도 이유없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금 기록을 봐도 역력히 느껴질 정도이니 ;;; 언론의 힘이 컸던 것 같군요. 당시 언론이 나름 분석한다고 별의별 얘기들을 많이 써놓고 종국에는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만 막으면 되고 이태리는 알베토리가 잘하니 그 선수만 막으면 한국이 이긴다는 결론 ....ㅡㅡ; 마라도나, 알베토리를 막을 수 있으면 당연히 이기겠죠. 그렇게 얘기하면 54 월드컵때도 푸스카스만 막았다면 한국이 예전에 16강 갔겠군요 ;; 이탈리아 전은 예측대로 알베토리가 잘했습니다만 한국은 그 선수를 막을 방법이 없었고 아르헨티나 전도 마찬가지였죠. 특히 아르헨티나 전은 지금까지 손꼽히는 대한민국 안습 경기중 하나구요.(허정무의 태권도 축구로 아직도 회자되는,, ㅜ~ㅜ) 하긴 32년만의 월드컵 진출이기도 하고 해외 선수야 차범근이 뛰는 분데스리가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정보가 전무했던 여건상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기대와 환희에서 시작된 86 월드컵은 실망감만 안기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샛별인 김주성 선수에 대한 프로팀의 관심은 그야말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주성 선수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팀은 유공코끼리였다고 하네요. 이미 85년에 미리 계약금을 지불하고 일종의 입도선매를 시도했던 것이죠. 김주성 선수도 좋다고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규정상 대학교 2학년 에는 프로팀과 계약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원천무효였던 것이죠. 대우로얄즈가 그 점을 이용해 김주성 선수와 계약을 제의하고 유공코끼리와의 선계약체결을 파기하게 됩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매우 흡사한 과정으로 전개되었던 김종부 선수의 경우는 현대가 프로팀 해체 선언등으로 김종부 스카우트 파문을 일으키며 촉망받던 축구천재 김종부 선수를 비운의 축구천재 1인으로 전락당한데 반해 유공코끼리는 김종부 선수에게 선계약금에 2배를 위약금으로 요구하는것으로 일단락 지었다는 점입니다. 안 그랬다면 한국축구는 또 한명의 불세출 스타를 어이없게 잃어버릴 뻔했죠..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우로얄즈에 입단한 김주성 선수는 신임 감독 이차만 감독 아래에서 단숨에 주전으로 도약해 공격진을 이끌게 됩니다. 87년 대우로얄즈의 독주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대단했었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김풍주 선수 편에서 이야기 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네요 ^^.. 다만 김주성 선수가 87프로축구대회 11월 1일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대 유공코끼리전에서 김주성 선수가 결승골 성공시키며 1:0 승리하며 잔여리그경기 3경기에 상관없이 대우로얄즈의 우승을 확정짓게 됩니다. 그리고 87시즌 시상식에서 여지없이 신인왕에 등극하며 동시에 K리그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공격수 부문에 선정되게 됩니다.

이후 88년부터 90년까지 부산에서의 김주성 출장기록은 27경기 출장 8골 7도움에 그쳤습니다. 굵직굵직한 대회들이 많았고 거의 모든 A매치를 위한 합숙훈련때마다 김주성 선수는 언제나 1순위 차출대상이었으니까요. 특히 이 기간중 유명했던 김주성 선수의 경기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대 중국전이 손꼽히고 있더군요.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시아 축구에서 아직은 월드컵 본선에 보내고 싶지 않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국가였는데요. 그런데 왠일인지 그날따라 후반 20분까지 0:0으로 골이 안터졌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과의 경기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지금도 그렇지만 오일머니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중동국가들에게 승리하길 기대하는 것 보다는 중국을 꺽어서 승점확보하는게 절실했을테니 여러모로 긴장되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 때 김주성 선수가 해결사로 나섭니다. 크로스가 올라온걸 번개같이 달려들어 헤딩으로 골을 터뜨린 것이죠. 그 후 필드 위의 야생마였던 김주성 선수의 거침없는 질주와 헤딩 장면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지는군요 ^^
그 후 가볍게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이기며 2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곧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길에 오릅니다. 물론 김주성 선수도 함께 말이지요. 여기서도 김주성 선수는 본선 3경기 모두 출장하는 영예를 누립니다. 다만 플레이가 좋았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당시 조편성에서 대한민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 역시나 만만한 조편성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86년보다는 나았다는게 위안거리였지만..;; 근데 성적은 86년보다도 초라했었죠. 벨기에 전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거의 하프라인을 넘어가지 못하는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였습니다. 김주성 선수도 벨기에의 윙백인 게레츠였던가 하여튼 그 선수에게 철저히 차단당하며 답답한 모습을 보여줬죠. 그리고 스페인 전은 황보관 선수의 프리킥 골만 기억하시는게 정신건강에 이롭구요 ㅡㅡ; 우루과이전도 아쉬운 경기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후반 20분경에 윤덕여 선수가 퇴장당한 이후부터는 이미 포기모드나 다를바 없었을 겁니다. 결국 그렇게 90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은 끝났죠..
이후 김주성 선수에게 괄목할만한 변화가 옵니다. 바로 트레이드 마크였던 '삼손' 야생마의 갈기를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이죠. 이후 지금까지 그 헤어스타일 그대로 시던 것 같더군요 ;ㅅ; 인터뷰 기사를 보니 당시 90년 월드컵 본선에서 보여준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워 변화를 위해 잘랐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여기에 비화가 숨겨져 있답니다. 당시 축구 사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 부산대우로얄즈 선수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김주성 선수도 물론 끼어있었죠. 그런데 김우중 회장 왈 '저기 저 머리 긴놈 뭐야?' 이 한마디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온 김주성 선수는 지금까지 그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ㅅ;....
그리고 91시즌 부산로얄즈에서 심기일전 프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여지없이 선보입니다. 개인 통산 한시즌 최다 출장인 37경기 출장 14골 5도움으로 또 한번의 부산의 우승을 이끄셨죠. 동시에 91시즌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미드필더 부문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91시즌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김주성 선수의 해외 이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죠.
아 빼먹을 뻔했네요. 김주성 선수를 언급할때 반드시 언급되는 그것, AFC 선정 아시아 올해의 선수 89,90,91 3회 연속 수상의 대기록말입니다. 당시 올해의 선수 선정은 기자단 투표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작금의 무개념으로 충만한 AFC 연맹이 생기기 이전이었기에 김주성 선수의 3회 연속 수상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군요 ^^a 위와 같은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김주성 선수가 해외에 본격 진출을 모색하게 됩니다.
91년 겨울 김주성 선수는 지금은 부산교공 감독이신 박상인 감독이 현역 선수시절 잠시 몸담았던 뒤스부르크로 날아가 1달여간의 입단테스트를 받고 계약 협상에 들어가게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군병역 문제로 뒤스부르크와의 협상은 결렬, 김주성 선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92년 1월 입영해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7월 VFB 보쿰으로 2년 임대 계약을 맺고 드디어 해외이적에 성공하게 됩니다. 당시 황선홍 선수도 그렇고 독일로 날아간 한국 선수들이 많아서 언론들도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군요..
하지만 김주성 선수는 VFB 보쿰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보장받지 못하는 주전자리, 그리고 차붐의 나라에서 온 선수라해도 유럽 특유의 텃세의식으로 무장한 눈초리에 대한 부담감 같은걸 감당하기란 쉽지 않으셨겠죠. 지금의 이동국 선수보다 몇갑절은 더 힘드셨을 겁니다 .. 거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그저 국내에서는 김주성 선수정도면 독일서도 잘하고 있으려니 하고 말았겠죠. 정말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결국 29경기 2골이라는 기록만을 남기고 김주성 선수는 부산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공격수 혹은 윙포워드로서의 김주성이 아니라 수비수로서의 김주성으로 말입니다.

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역시 김주성 선수는 3경기 모두 출전하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출전에 3회 연속 모든 경기 소화라는 기록을 작성하게 됩니다. 대 독일전에서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당시에 저야 물론 고정운 선수에 홀딱 반했었지만 지금와서 다시보니 김주성 선수도 참 노련하게 잘 대처했던 것 같습니다. 수미에 가까운 포지션이셨던 것 같은데 고참급 선수로서 필드에서 선수들을 잘 이끈 것 같아요.
94년 미국 월드컵 뒤 연골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등 여러 이유로 94시즌 3경기 출장에 그쳤던 김주성 선수는 95년부터 부산에서도 본격적으로 수비수로 뛰게 됩니다. 정확히는 스위퍼나 리베로에 가까우셨다고 하네요. 당시 부산 경기를 본적이 없으니 어떤 활약을 선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흔히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한 가장 모범 케이스로 손꼽히는 선수가 김주성 선수이니 당연히 잘하셨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96년 아시안컵 김주성 선수는 대표팀에 차출되었습니다만 유명한 이란한테 2:6 떡실신 당할 때는 속수무책.. 뭐 당시 한국 선수단 대부분이 그랬지만 우왕좌왕 분명히 미들로 출전하셨는데 공격이 안되니 어쩔 수 없이 최전방으로 치고 올라가는등 전체적으로 전술의 틀이 헝클어지고 자멸해버렸다고 평가받습니다 ;ㅅ; 그 후로 김주성 선수가 국대 경기 뛰는걸 본 기억이 없네요 ;;;
그리고 97년 김주성 선수가 명실공히 부산의 레젼드로 거듭난 해였습니다. 부산은 97년 당시 정규리그와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까지 석권, 한시즌 3개 대회를 독식하는 기록을 세웠고요. 총 38경기에서 22승을 기록하며 한시즌 최다승 기록도 갈아치웠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기록들은 모두 김주성 선수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부산 선수진들이었기에 가능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군요.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시상식에서 김주성 선수는 이론의 여지없이 97시즌 MVP에 등극합니다. 프로선수로서 처음 받아보는 MVP이셨던 거죠. 그리고 97시즌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수비수 부문에 선정되셨죠. 이로써 통산 필드플레이어 3개부문의 베스트플레이어를 모두 석권하는 진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앞으로 이런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까요?
98년 월드컵 김주성 선수가 여기까지 출전하셨다면 이건 뭐 엄청난 대기록이겠지만 그것까지는 힘들었죠. 98시즌부터는 슬슬 힘이 딸리시는 모습이 조금씩 보였으니까요. 거친 파울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것도 노련하다기 보다는 거의 '형님이 태클 좀 하겠다는데 어린놈이 엥기냐?' ;ㅅ; 거의 뭐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부산 경기를 관전한 저로서는 당시 김주성 선수 모습을 심판한테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 선수한테 태클도 심하게 들어가는 극렬 파이터 수비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딱 이을용 선수가 김주성 선수 후반기를 가장 빼닮은 것 같네요 ^^;;
99시즌 마지막까지 김주성 선수는 33경기에 출장하며 아직도 필드에서 더 뛸 것처럼 활보하시더니만 은퇴하신다고 할때는 참으로 애석했었죠. 누구 말마따나 너무 연봉부담이 쎄서 안그래도 당시 대우가 파산직전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은퇴시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김주성 선수 본인이 은퇴 후에도 제대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힘차게 전진하시는 모습을 보면 은퇴를 그 때 하신게 오히려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부산의 전설 김주성 선수로서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16번이라는 그의 번호는 영원히 부산에서의 플레이와 함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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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 은퇴 이후의 행보는 말씀 안드려도 다 아실테지만 현재 축구협회 대외협력국 부장으로 축구행정가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왜 감독생활을 하지 않느냐는 인터뷰 기사의 질문에 자신처럼 축구 행정가의 길을 걷는 선수도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짤막하게 답한 글귀에서 김주성 선수로서도 최고였고 선수 이후에도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주시면 더 바랄 나위가 없죠 ^^
홍차도둑님 말씀과 댓글 의견을 참조해 약간 수정을 가했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생년월일 : 66년 1월 17일 생
학력 : 조선대 졸업
포지션 : FW, MF, DF
K리그 통산 기록 : 255경기 출전 35골 17도움
부산 통산 기록 : 위와 동일
국가대표 통산 기록 : 76경기 출전 13골
○ 주요 기록
너무 많아서 다 써넣기도 벅차네요..
85년 1월 1일 부산에서 열린 88팀 VS 86 월드컵대표팀 친선경기에서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음.
85년 7월 21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인도네시아 전에 후반 교체 출장으로 첫 A매치 출장. 그 경기에서 데뷔골 작렬!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참가. 본선 3경기 모두 출전
87년 대우로얄즈 입단. 그해 대우로얄즈 우승. K리그 신인왕 수상,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공격수 부문 선정.
이후 왠만한 국가대표 경기에는 모두 참가하며 AFC 선정 올해의 선수 89,90,91 3년 연속 선정되는 대기록 작성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참가. 본선 3경기 모두 출전
91년 부산대우로얄즈 우승. 91 K리그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미드필더 부문 선정.
92년 7월 VFB 보쿰으로 임대계약 형식으로 입단
94년 미국월드컵 본선 참가. 본선 3경기 모두 출장
94년 말 부산으로 복귀. 수비수로 포지션 전환
97년 부산로얄즈 우승. MVP 수상. 97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수비수 부문 선정.
99년 현역 은퇴 ㅜㅡㅜ 국내 최초 프로 선수로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내 최초 현역 은퇴 경기를 개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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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부산의 전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지나간 세월을 더듬으며 환희에 젖는 부산의 명실상부한 TOP 레젼드 김주성 선수입니다. 원래는 레젼드 소개 코너 막판에 가서나 김주성 선수를 쓰려고 했는데 김주성 선수를 써달라는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김주성 선수에 대한 얘기를 조금 일찍 꺼내봤습니다. 위의 주요기록 정리하는 것도 앞선 2명의 선수보다 갑절은 시간이 걸렸네요 ;; 뒤에 이어지는 내용도 장문의 스크롤 압박이 예상됩니다 ....;;
김주성 선수에 대한 기억은 우선 99년 현역 은퇴 경기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은퇴 경기를 하실 때 '왜 부산에서 안하고 속초에서 하는걸까?' 하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은퇴 경기를 하신 날이 99시즌 오프 후 11월 겨울이었죠. 당시 프로축구연맹에서 프로축구 올스타 VS 김주성's 올스타로 속초에서 경기를 성사시키며 김주성 선수에게 공로패도 전달하고 대단히 훈훈한 분위기에서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한 선수의 은퇴를 기념 경기가 이루어졌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김주성 선수 고향이 강원도 양양군이시더군요. 게다가 축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속초 중앙 초등학교부터 이셨다고 하니 김주성 선수에게 속초는 은퇴 경기를 열기에 최적인 남다른 의미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김주성 선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축구부에 입단하고 축구에 인생을 걸기로 한 시기이지요.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김주성 선수는 그저 평범한 축구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5년 후에 대한민국의 왠만한 사람 모두 김주성 선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 ;;
중학교 졸업 후 김주성 선수를 받아준 학교는 중앙고등학교 였습니다. 축구로 전국에서 꽤나 이름날리는 학교는 결코 아니었죠. 하지만 김주성 선수가 입학한 첫해에 중앙고등학교는 전국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김주성 선수는 고교 상비군 (앞서 얘기해본 김풍주 선수도 고교 상비군 이셨더군요.)에 발탁되며 뒷날 화려한 도약을 예고합니다.
고교 상비군이란 당시 교육부에서 고교 축구 선수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 낙오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아 만든 제도였다고 하네요. 즉 고교 상비군이란 명단을 짜놓고 거기에 이름을 올린 고교 선수는 각 대학교 축구부에서 무조건 입학허가를 내줘야만 하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고려대나 연세대같은 명문 축구부는 특급 고교 에이스로 활약하는 알짜배기 선수들만 쏙쏙 빼갔기에 고교 상비군에만 이름을 올리는 선수는 대체로 하위권 대학 축구부에만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김주성 선수는 그리하여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조선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고교 졸업 당시 포항제철 등에서 입단 제의가 있었지만 고등학교 감독의 권유로 (조선대에서는 김주성 선수 입학을 조건으로 다른 2명의 중앙고 축구선수의 입학을 허락했었다고 하네요. 일종의 끼워팔기 ;ㅅ;) 조선대에 입학했던 것이죠. 그 후 조선대 2학년 재학 중에 당시 청소년대표팀 감독이셨던 김삼락 감독의 눈에 김주성 선수가 포착됩니다. 그리고 청대 발탁 후 축구인들 사이에 김주성 선수에 대한 입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하네요. 김주성 선수의 화려한 데뷔를 위한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드디어 김주성 선수를 당시 88올림픽대표팀 양성에 매진하던 박종환 감독이 파격적으로 발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85년 1월 1일. 당시 친선경기격인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에 86 멕시코 월드컵을 위한 월드컵 대표팀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한 88팀이 출전하여 부산에서 경기를 벌이게 됩니다. 당시 86 월드컵 대표팀에는 정용환, 박경훈, 허정무, 박창선, 변병주, 최순호 등 불세출의 대 스타급 선수들로 화려하게 구성되어있었고 88팀은 그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 선수들이었겠죠 ;ㅅ; 부산에서 경기가 열렸을 때 관중들은 88팀을 응원했다고 하네요.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워낙 멤버진에서 게임이 안될 것 처럼 보였을테니깐요. 그런데 여기서 김주성 선수가 그야말로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줍니다. 대선배인 센터백 정용환 풀백 박경훈 선수를 중심으로 뭉친 지금 봐도 후덜덜한 수비진을 끊임없이 파고들더니만 막바지에는 중거리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88팀의 2:1승리의 주인공이 됩니다. 당시 언론사 및 축구인들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직감했고 그것은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86 월드컵 대표팀은 김주성 선수를 차출합니다. 그리고 7월 인도네시아전에서 후반전 선발이었던 김석원 선수가 부상으로 아웃되자 교체 투입돼 첫 A매치 출전 그리고 곧바로 첫 A매치 골을 작성합니다. 축구의 신이 김주성 선수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김주성 선수는 언제나 그 기회를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가장 멋진 활약으로 보답해냈다고 표현하고 싶군요. 정말 멋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안 떠오르는.. ;ㅅ; 게다가 김석원 선수가 인도네시아 전 부상으로 대표팀 잔여 경기를 뛸 수 없게되자 그 이후부터 국대 붙박이 왼쪽 윙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것은 86 월드컵 본선에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당시 김주성 선수는 19살, 사실상 대표팀 막내이자 최종 엔트리 막차에 뛰어 올라탄 그런 선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성 선수는 86월드컵 본선 3경기를 모두 소화해버립니다. 이런 케이스는 정말 보기드물죠. 김주성 선수의 등장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가 또 김주성 선수같은 플레이어가 나타나길 한국축구가 얼마나 기다려왔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거기다 선정 주체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후 90년 월드컵을 빛낼 예비스타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뭐 그렇다해도 당시 86 월드컵 대표 멤버는 정말 전설적인 선수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던데 비해서는 너무 성적이 저조했죠. 당시 사람들 분위기는 잘만하면 8강도 가능하다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무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불가리아라는 괴수팀 대모음집스러운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는데도 이유없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금 기록을 봐도 역력히 느껴질 정도이니 ;;; 언론의 힘이 컸던 것 같군요. 당시 언론이 나름 분석한다고 별의별 얘기들을 많이 써놓고 종국에는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만 막으면 되고 이태리는 알베토리가 잘하니 그 선수만 막으면 한국이 이긴다는 결론 ....ㅡㅡ; 마라도나, 알베토리를 막을 수 있으면 당연히 이기겠죠. 그렇게 얘기하면 54 월드컵때도 푸스카스만 막았다면 한국이 예전에 16강 갔겠군요 ;; 이탈리아 전은 예측대로 알베토리가 잘했습니다만 한국은 그 선수를 막을 방법이 없었고 아르헨티나 전도 마찬가지였죠. 특히 아르헨티나 전은 지금까지 손꼽히는 대한민국 안습 경기중 하나구요.(허정무의 태권도 축구로 아직도 회자되는,, ㅜ~ㅜ) 하긴 32년만의 월드컵 진출이기도 하고 해외 선수야 차범근이 뛰는 분데스리가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정보가 전무했던 여건상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기대와 환희에서 시작된 86 월드컵은 실망감만 안기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샛별인 김주성 선수에 대한 프로팀의 관심은 그야말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주성 선수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팀은 유공코끼리였다고 하네요. 이미 85년에 미리 계약금을 지불하고 일종의 입도선매를 시도했던 것이죠. 김주성 선수도 좋다고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규정상 대학교 2학년 에는 프로팀과 계약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원천무효였던 것이죠. 대우로얄즈가 그 점을 이용해 김주성 선수와 계약을 제의하고 유공코끼리와의 선계약체결을 파기하게 됩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매우 흡사한 과정으로 전개되었던 김종부 선수의 경우는 현대가 프로팀 해체 선언등으로 김종부 스카우트 파문을 일으키며 촉망받던 축구천재 김종부 선수를 비운의 축구천재 1인으로 전락당한데 반해 유공코끼리는 김종부 선수에게 선계약금에 2배를 위약금으로 요구하는것으로 일단락 지었다는 점입니다. 안 그랬다면 한국축구는 또 한명의 불세출 스타를 어이없게 잃어버릴 뻔했죠..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우로얄즈에 입단한 김주성 선수는 신임 감독 이차만 감독 아래에서 단숨에 주전으로 도약해 공격진을 이끌게 됩니다. 87년 대우로얄즈의 독주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대단했었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김풍주 선수 편에서 이야기 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네요 ^^.. 다만 김주성 선수가 87프로축구대회 11월 1일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대 유공코끼리전에서 김주성 선수가 결승골 성공시키며 1:0 승리하며 잔여리그경기 3경기에 상관없이 대우로얄즈의 우승을 확정짓게 됩니다. 그리고 87시즌 시상식에서 여지없이 신인왕에 등극하며 동시에 K리그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공격수 부문에 선정되게 됩니다.

이후 88년부터 90년까지 부산에서의 김주성 출장기록은 27경기 출장 8골 7도움에 그쳤습니다. 굵직굵직한 대회들이 많았고 거의 모든 A매치를 위한 합숙훈련때마다 김주성 선수는 언제나 1순위 차출대상이었으니까요. 특히 이 기간중 유명했던 김주성 선수의 경기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대 중국전이 손꼽히고 있더군요.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시아 축구에서 아직은 월드컵 본선에 보내고 싶지 않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국가였는데요. 그런데 왠일인지 그날따라 후반 20분까지 0:0으로 골이 안터졌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과의 경기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지금도 그렇지만 오일머니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중동국가들에게 승리하길 기대하는 것 보다는 중국을 꺽어서 승점확보하는게 절실했을테니 여러모로 긴장되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 때 김주성 선수가 해결사로 나섭니다. 크로스가 올라온걸 번개같이 달려들어 헤딩으로 골을 터뜨린 것이죠. 그 후 필드 위의 야생마였던 김주성 선수의 거침없는 질주와 헤딩 장면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지는군요 ^^
그 후 가볍게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이기며 2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곧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길에 오릅니다. 물론 김주성 선수도 함께 말이지요. 여기서도 김주성 선수는 본선 3경기 모두 출장하는 영예를 누립니다. 다만 플레이가 좋았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당시 조편성에서 대한민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 역시나 만만한 조편성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86년보다는 나았다는게 위안거리였지만..;; 근데 성적은 86년보다도 초라했었죠. 벨기에 전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거의 하프라인을 넘어가지 못하는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였습니다. 김주성 선수도 벨기에의 윙백인 게레츠였던가 하여튼 그 선수에게 철저히 차단당하며 답답한 모습을 보여줬죠. 그리고 스페인 전은 황보관 선수의 프리킥 골만 기억하시는게 정신건강에 이롭구요 ㅡㅡ; 우루과이전도 아쉬운 경기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후반 20분경에 윤덕여 선수가 퇴장당한 이후부터는 이미 포기모드나 다를바 없었을 겁니다. 결국 그렇게 90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은 끝났죠..
이후 김주성 선수에게 괄목할만한 변화가 옵니다. 바로 트레이드 마크였던 '삼손' 야생마의 갈기를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이죠. 이후 지금까지 그 헤어스타일 그대로 시던 것 같더군요 ;ㅅ; 인터뷰 기사를 보니 당시 90년 월드컵 본선에서 보여준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워 변화를 위해 잘랐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여기에 비화가 숨겨져 있답니다. 당시 축구 사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 부산대우로얄즈 선수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김주성 선수도 물론 끼어있었죠. 그런데 김우중 회장 왈 '저기 저 머리 긴놈 뭐야?' 이 한마디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온 김주성 선수는 지금까지 그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ㅅ;....
그리고 91시즌 부산로얄즈에서 심기일전 프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여지없이 선보입니다. 개인 통산 한시즌 최다 출장인 37경기 출장 14골 5도움으로 또 한번의 부산의 우승을 이끄셨죠. 동시에 91시즌 올해의 베스트일레븐 미드필더 부문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91시즌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김주성 선수의 해외 이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죠.
아 빼먹을 뻔했네요. 김주성 선수를 언급할때 반드시 언급되는 그것, AFC 선정 아시아 올해의 선수 89,90,91 3회 연속 수상의 대기록말입니다. 당시 올해의 선수 선정은 기자단 투표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작금의 무개념으로 충만한 AFC 연맹이 생기기 이전이었기에 김주성 선수의 3회 연속 수상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군요 ^^a 위와 같은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김주성 선수가 해외에 본격 진출을 모색하게 됩니다.
91년 겨울 김주성 선수는 지금은 부산교공 감독이신 박상인 감독이 현역 선수시절 잠시 몸담았던 뒤스부르크로 날아가 1달여간의 입단테스트를 받고 계약 협상에 들어가게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군병역 문제로 뒤스부르크와의 협상은 결렬, 김주성 선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92년 1월 입영해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7월 VFB 보쿰으로 2년 임대 계약을 맺고 드디어 해외이적에 성공하게 됩니다. 당시 황선홍 선수도 그렇고 독일로 날아간 한국 선수들이 많아서 언론들도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군요..
하지만 김주성 선수는 VFB 보쿰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보장받지 못하는 주전자리, 그리고 차붐의 나라에서 온 선수라해도 유럽 특유의 텃세의식으로 무장한 눈초리에 대한 부담감 같은걸 감당하기란 쉽지 않으셨겠죠. 지금의 이동국 선수보다 몇갑절은 더 힘드셨을 겁니다 .. 거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그저 국내에서는 김주성 선수정도면 독일서도 잘하고 있으려니 하고 말았겠죠. 정말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결국 29경기 2골이라는 기록만을 남기고 김주성 선수는 부산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공격수 혹은 윙포워드로서의 김주성이 아니라 수비수로서의 김주성으로 말입니다.

부산팬으로서 참 인상적인 사진입니다. 가운데 노정윤 선수 맞죠? 김주성, 노정윤, 황선홍 모두 부산과 매우 밀접한 인연이 있네요^^
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역시 김주성 선수는 3경기 모두 출전하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출전에 3회 연속 모든 경기 소화라는 기록을 작성하게 됩니다. 대 독일전에서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당시에 저야 물론 고정운 선수에 홀딱 반했었지만 지금와서 다시보니 김주성 선수도 참 노련하게 잘 대처했던 것 같습니다. 수미에 가까운 포지션이셨던 것 같은데 고참급 선수로서 필드에서 선수들을 잘 이끈 것 같아요.
94년 미국 월드컵 뒤 연골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등 여러 이유로 94시즌 3경기 출장에 그쳤던 김주성 선수는 95년부터 부산에서도 본격적으로 수비수로 뛰게 됩니다. 정확히는 스위퍼나 리베로에 가까우셨다고 하네요. 당시 부산 경기를 본적이 없으니 어떤 활약을 선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흔히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한 가장 모범 케이스로 손꼽히는 선수가 김주성 선수이니 당연히 잘하셨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96년 아시안컵 김주성 선수는 대표팀에 차출되었습니다만 유명한 이란한테 2:6 떡실신 당할 때는 속수무책.. 뭐 당시 한국 선수단 대부분이 그랬지만 우왕좌왕 분명히 미들로 출전하셨는데 공격이 안되니 어쩔 수 없이 최전방으로 치고 올라가는등 전체적으로 전술의 틀이 헝클어지고 자멸해버렸다고 평가받습니다 ;ㅅ; 그 후로 김주성 선수가 국대 경기 뛰는걸 본 기억이 없네요 ;;;
그리고 97년 김주성 선수가 명실공히 부산의 레젼드로 거듭난 해였습니다. 부산은 97년 당시 정규리그와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까지 석권, 한시즌 3개 대회를 독식하는 기록을 세웠고요. 총 38경기에서 22승을 기록하며 한시즌 최다승 기록도 갈아치웠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기록들은 모두 김주성 선수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부산 선수진들이었기에 가능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군요.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시상식에서 김주성 선수는 이론의 여지없이 97시즌 MVP에 등극합니다. 프로선수로서 처음 받아보는 MVP이셨던 거죠. 그리고 97시즌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수비수 부문에 선정되셨죠. 이로써 통산 필드플레이어 3개부문의 베스트플레이어를 모두 석권하는 진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앞으로 이런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까요?
98년 월드컵 김주성 선수가 여기까지 출전하셨다면 이건 뭐 엄청난 대기록이겠지만 그것까지는 힘들었죠. 98시즌부터는 슬슬 힘이 딸리시는 모습이 조금씩 보였으니까요. 거친 파울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것도 노련하다기 보다는 거의 '형님이 태클 좀 하겠다는데 어린놈이 엥기냐?' ;ㅅ; 거의 뭐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부산 경기를 관전한 저로서는 당시 김주성 선수 모습을 심판한테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 선수한테 태클도 심하게 들어가는 극렬 파이터 수비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딱 이을용 선수가 김주성 선수 후반기를 가장 빼닮은 것 같네요 ^^;;
99시즌 마지막까지 김주성 선수는 33경기에 출장하며 아직도 필드에서 더 뛸 것처럼 활보하시더니만 은퇴하신다고 할때는 참으로 애석했었죠. 누구 말마따나 너무 연봉부담이 쎄서 안그래도 당시 대우가 파산직전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은퇴시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김주성 선수 본인이 은퇴 후에도 제대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힘차게 전진하시는 모습을 보면 은퇴를 그 때 하신게 오히려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부산의 전설 김주성 선수로서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16번이라는 그의 번호는 영원히 부산에서의 플레이와 함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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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 은퇴 이후의 행보는 말씀 안드려도 다 아실테지만 현재 축구협회 대외협력국 부장으로 축구행정가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왜 감독생활을 하지 않느냐는 인터뷰 기사의 질문에 자신처럼 축구 행정가의 길을 걷는 선수도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짤막하게 답한 글귀에서 김주성 선수로서도 최고였고 선수 이후에도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주시면 더 바랄 나위가 없죠 ^^
홍차도둑님 말씀과 댓글 의견을 참조해 약간 수정을 가했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by | 2007/12/22 22:07 | 부산's 레젼드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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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복귀후 TV cf 도 찍었었는데 그때 한 대사가 꽤나 유행탔었습니다. "스피드가 기술입니다" 라는 유행어 였는데 당시 개그프로그램 같은 데서 많이 써먹었습니다.
전 야구팬인데 대우로얄즈가 부산 아이파크로 바뀌기 전까진 축구도 꽤나 좋아했었거든요. 당시 대우는 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거제고 - 아주대 - 대우 로얄즈 라인을 굳건하게 다지면서 선진화를 걷고 있었지요. 아마 김우중 회장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축구에서 로얄즈의 위세는 수원삼성 이상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1. 당시 조영증 선수는 공격수로 뛰었습니다. 85년 네팔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격수였으며 투톱이었지요. 실제로 윤상철-황선홍 선수가 '연속골 기록' 갈아치우기 전까지의 K리그 최고의 연속골 기록을 조영증 선수가 가지고 계셨습니다. 6경기 연속골이었지요. 수비수로 돌아오신건 86년 아시안게임때의 정용환 선수의 부상 탈락으로 인해서 수비수로 내려가실 때까진 공격에서 뛰셨습니다. 아 물론 원래 포지션은 수비가 맞습니다만. 이러한 여러가지를 소화하신 분입니다.
2. 1986년 월드컵 당시 19세의 선수가 두명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김주성 선수였습니다. 때문에 주목 받았으며 3경기 모두 주전으로 뛰었기에 4년뒤에도 기대할만 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당시 이탈리아의 스트라이커 알토베리가 듣보잡은 아닙니다. 알토베리는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월드컵 대회의 마지막 골-그 다음 월드컵의 첫번째 골'을 기록한 스트라이커죠 개막전에 전대회 우승팀이 뛰는 것이 1970년 서독 월드컵때부터 시작해서 2002월드컵까지였기 때문에 다시 '우승팀이 개막전'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알토벨리의 이 기록은 영원히 남게 됩니다. 당시 신문기사, 특히 유일한 스포츠 신문이라는 일간 스포츠의 당시 월드컵 기사를 봐도 알토벨리에 대한 기사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쓰신 글로만 보면 로시-로시만 이야기 한 것으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겠네요, 당시 일간 스포츠에서도 파울로 로시에 대한 기사는 없었고 알토베리에 대한 기사도 많았습니다. 되려 그렇게 따지자면 잉글랜드의 리네커는 거의 나오지도 않았죠, 당시 잉글랜드의 주전은 다른 선수였거든요. 키가 무지 큰 선수였는데 이름이 잠깐 생각이 안납니다 후우~
4.1990월드컵 예선에서 중국이 3류팀이라니요? 그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 이후부터 상당히 강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마린 이라는 스트라이크에 대한 의존도가 무지 높았지만 그 이후부턴 차근차근 준비해 왔으며 '언제든지 아시아 정상권은 아니더라도 정상들을 위협할 수 있는' 팀으로 자리매김한게 1990년 월드컵 지역예선입니다. 이때부터 중국은 한국의 월드컵-올림픽 도전에 있어서 '강력한 대항마'로 등장하죠. 물론 그 이전까진 아니었지만 1990 월드컵 지역예선때만 하더라도 전체적인 전력에서 한국에 열세였다지만 그렇다고 한국에게 만만한 팀은 아니었습니다.
5. 스위퍼이긴 한데 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부산의 스위퍼 중 최고의 공력력과 수비력을 동시에 보유한 스위퍼는 박현용 선수입니다. 김주성 선수는 스위퍼로서 공격력은 괜찮았지만 리베로라고 하긴 그렇습니다. 뭐 사실 홍명보도 리베로라고는 하지만 홍명보는 장담하지만 리베로스런 움직임을 보여준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김주성선수가 리베로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적이 있다면 있지만요. 김주성 선수의 스위퍼 변신은 대단한 성공작인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부산의 수비를 뚫긴 매우 어려웠거든요. 대단한 수비력을 보여주었지요. 공격수->수비수로의 변신 성공의 대표적인 예를 하석주로 많이 들지만 제가 볼땐 구본석(유공)과 김주성 선수의 예가 가장 걸맞습니다.
6. 알리 다에이에게 발린건 김주성보다는 허기태(유공) 선수라 봐야죠...허기태 선수가 완전히 밀려버린 뒤엔 김주성선수가 들어가긴 늦은 상황, 거기다가 사실 김주성 선수는 그때 수비라고 하긴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중간에 교체투입 들어갔을 때 공격으로서 들어갔거든요. 당시 하이텔에 전 그 경기 후기에서 '김주성의 투입은 패착중 하나였다. 너무 공격일변도로 놓으면서 후반 수비가 체력저하가 되었을 때 김주성의 위치는 너무나도 애매해져버렸다' 라고 했었으니까요. 그 경기에선 김주성 선수가 수비에서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7. 말씀하신 '엉아가 태클하는데 어린애가 떼쓰냐?' 사간의 백미가 바로 데니스선수가 김주성 선수 얼굴 밟아버린 사건이죠.
사실 이점에 대해선 서운하실지 몰라도 데니스선수의 맘이 이해가 가더군요. 그해 김주성 선수의 수비는 정말 '나잇발로 미는' 수준이었거든요.
8. 개인적으로 김주성 해설위원의 해설은 영 아니라서...해설위원으로선 수준미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선수생활의 경험이나 이런저런 것을 들려준다던가 하면서 끌고가면 좋을텐데 경기 흐름을 못읽는 해설은 정말 아니었거든요. 특색이 없었으며 잘못된 정보 전달이 많았던 해설이라서 오래 하지도 못하시고 또 곧바로 행정가쪽으로 가셨으니까요.
차라리 이런 점에선 홍명보 보다는 나은 행보라고 봅니다. 행정가 하겠다고 선언하다가 코치를 넙죽 받는 홍명보의 행보는 전 지금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여간...부산의 레전드중 레전드라는 면에선 동의합니다만...글 내용엔 동의할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은게 이번 글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밀글 님//하하하하 ^^ 비밀글 님 덕분에 정말 즐거워졌습니다. 굳이 비밀글로 남기시지 않으시고 이 글 보는 분 모든분이 공유해도 될 정보라고 생각하는데 ㅎㅎ; 어쨋거나 김주성 선수 너무 귀여우시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또.. 일단 파울로 로시 선수에 관한 건은 제 불찰입니다. 당시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는 여론들은 86 월드컵 대비를 위한 책자나 자료를 내놓으면서 그 자료의 원천을 82 월드컵에서 찾았다고 하던데요? 82월드컵의 명승부는 뭣이고 82월드컵의 스타는 누구고 이렇게요. 82 월드컵의 스타는 두말할 것 없이 파울로 로시 선수였으니까요. 86 월드컵 때 파울로 로시가 승부조작 파문으로 못나오다는걸 알고있는 사람들은 스포츠 전문기자들이 아니면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울로 로시에 관한 얘기가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점은 후추에 글 쓰시는 김유석 님이 쓰신 글에서 확인하고 그대로 글을 올렸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군요. 제 불찰입니다 ㅜㅡㅜ..
그리고 대 이란전에 궁금한 사항이 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축협 기록에요) 김주성 선수가 선발이었고 53분에 이기형 선수와 교체 된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후반전에 교체투입됐다는 말씀과 충돌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96 아시안컵에서 김주성 선수는 본선 모든 경기를 선발 출장했고 쿠웨이트 전을 제외하고 1차전 아랍에미리트전과 2차전 인도네시아전 모두 수비수로 출전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이란전때도 수비수 내지는 최소한 수미로 출전하지 않았나 싶던데요. 이거야 정확한 기록자료가 있으니 다시한번 돌려보면 확실하겠네요;
아 이란전에서의 김주성의 교체는 제가 꺼꾸로 알고 있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하지만 그날 김주성은 수비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공격 성향이 상당히 셌습니다. 결국 이기형 선수와 교체된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연방으로 허기태 선수가 일차 저지에서 밀리면서(나중에 허기태 선수에게 직접 물어봤는데 "알리 다에이가 내 가슴팍을 얼마나 쳐댔는데!" 하면서 반칙에 의해서 밀렸다고 증언하시더군요) 완전히 허벌났으니까요. 86vs88팀의 경우는 제가 찾아봐야겠습니다만, 그 당시 확실한 붙박이는 풀백을 맡은 박경훈-김평석 선수였고 가운데가 지금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이전에 플라마쪽에서 DB정리하면서 다 정리를 했었는데 지금 머릿속에선 헷갈리네요.
하여간 이란과의 경기에서는 공격성향이 상당히 셌습니다. 1-0으로 끌려가면서 전반전에 한국은 오버페이스나 다름없을 정도로 공격으로 나서면서 2-1로 역전은 시켰는데 이때의 여파가 너무 컸는지 후반에 그 발림당하는 일이 발생하죠. 이 경기에서 김주성이 공격에 나서는 것을 너무 많이 본지라 이 경기에선 '출전은 수비수'인데 '실상 뛰는건 공격 미드필더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하간 기록적으로는 도는 로스터상으로는 수비 또는 공격으로 되어 있더라도 실제 경기 투입에선 역할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주성 선수처럼 최 전방과 공격미들, 수비를 담당했던 선수들은 나중에 가면 경기에서 '스윙'으로 다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어서 참 애매한 경우가 생기죠 ^^
口笛 님의 답글에 첨언드리자면. 당시 대우는 구단주인 김우중회장이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지라 대우광고에 몇번 선수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광고들은 바둑잡지에 나와있는데, 그 이유는 김우중회장이 또 바둑을 엄청 좋아했어요. 아마로서는 고수급인 4단인데, 이게 '예의상 주는' 명예단이 아니라 실제 실력이 그정도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한국기원 이사장을 한지라(1990년대 중반쯤인가? 초반쯤인가에 그만두죠). 당시 한국기원에서 발간한 월간'바둑' 에 대우 광고가 많이 나왔죠. 그래서 1989년쯤의 잡지를 보면 김풍주선수도 광고에 나와요(아마 이운재 선수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골키퍼가 광고 나온 극히 드문 케이습니다). 이때 김주성도 VTR 선전에 나왔는데 그게 1990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95년은 기억이 안나는군요...
1990년대까지 축구팀은 독립채산 즉, 독자적인 회사로 운영되지 않고 모기업의 한 부서였지요. 보통 축구팀은 홍보부 쪽의 산하 부서나 '스포츠 팀' 정도로 나눠져 있었습니다.(다른 스포츠나 기업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부산 대우는 어느 부서였을까요? ^^
정답은...비서실 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스포츠 역사상 스포츠팀이 모기업의 비서실 직속 산하에 있던 팀은 부산대우로얄즈가 유일하죠. 연산동쪽의 독채를 사용한것도(가끔가다 서울에서 놀러가곤 했죠) 유일했고, 당시 부산 대우 구단의 마케팅 팀에는 한때 대우에서 알아주는 영업맨이 배속되기도 하는 등 엄청 신경 썼었죠.
아 뒤늦게 생각난건데 김주성선수가 독일로 갈 때 일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시 김주성이 풀려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항의 박태준 회장님이 달려드셨어요. '그만한 스타를 잡아야 한다. 백지수표 끊어줄테니 잡아와라!' 라는 특명을 내리자마자 포항직원의 한마디 "김주성이가 분데스리가 간다는데요" 라는 말에 "그럼 보내줘야지, 김주성 정도라면 분데스리가 물도 먹어봐야 하는거라~" 하면서 스카우트 뛰어들지도 않고 "근데 우리가 도와줄일 없대?" 라고 말해주신 통큰 일이 있었습니다.
최용수 선수가 웨스트햄 못간게 LG의 지원미흡이었는데 자기네 선수 아닌데도 '포항제철' 광고 필요하면 싣겠다고 지원사격 준비해주신 예는 김주성 선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구단주나 사장 안계시잖아요? ^^
사커월드.. 컬럼게시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안성민 님 ^^ 원래 천천히 올릴려고 그랬는데 안성민님께 들켰(?)으니 후딱 올려야 겠네요. 오늘 김풍주 선수 글을 올리고 내일 김주성 선수 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