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는 부산의 레젼드(?) part 02. 박양하 (86~90)

선수사진 한 장 괜찮은걸로 구하는 것도 힘들군요. 

성명 : 박양하

생년월일 : 1962년 5월 28일

학력 : 고려대 졸업

포지션 : MF

K리그 통산기록 : 통산 53출장 2득점 9도움

부산 통산 기록 : 위와 동일

국가대표경력 : 전무함. 다만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1차 예선전을 위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상비군에 이름을 올린적 있음.

○주요 기록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됨. 87년 대우로얄즈 우승당시 박양하 선수 출장기록은 5경기 1도움에 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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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의아하시리라 미루어 짐작되는군요. '이게 어딜봐서 부산 레젼드냐!?' 이럴만한 한숨나오는 기록 ;ㅅ; 그런데 분명 부산아이팤 공식 홈페이지에 레젼드 타이틀에 올라와있는 선수이기도 하고 이제 내년부터 내셔널리그에서 감독으로써의 박양하씨의 모습을 지켜볼수 있게되었기에 원래는 불멸의 골킵 김풍주 선수를 다뤄볼려다 급히 박양하 선수 이야기를 해보려고 자료를 모아봤습니다.

80년대 학원축구의 전설, 한국의 조지 베스트(?), 보헤미안스타일 .. 박양하 선수에게 붙는 대표적인 꼬리표 3가지 입니다. 저 3가지만 봐도 축구 선수로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대충 짐작이 될듯 하네요.. ㅡㅅㅡ

박양하 선수는 소싯적 창신공고 재학 시절부터 고교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 것 같지만 당시 학원축구에서 베스트일레븐 중 수비진이 공격 전개시 하는 일이라곤 자기 포지션 지키면서 상대팀 역습을 차단하고 공격수에게 롱패스를 찔러주는게 전부였습니다. 미들진은 일종의 정거장으로 (링커 linker라고 하더군요) 수비진에서 흘러온 볼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윙포워드에게 건네주는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미들이 조금이라도 볼을 끌거나 드리블을 시도할라치면 감독이 바로 교체 아웃시켜서 박살을 내버렸다네요 ;ㅅ; 공격진은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어정거리다 볼이 오면 드리블 돌파와 타고난 피니셔 능력으로 골을 넣는 것이죠. 이게 전술의 전부였습니다. 요컨대 뻥축구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해내느냐가 전술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박양하 선수는 말 그대로 자신이 필드에서 그 고정돼있던 전술의 패러다임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재구축해버렸다고 합니다. 미칠듯한 개인기로 상대 선수 4~5명을 단숨에 제끼는 건 예삿일이고 개인기 뒤에 공격진에게 찔러주는 킬패스는 보는 사람을 숨넘어가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게다가 흔히 플메의 약점으로 지적하는 체력부족이나 몸빵이 딸린다는 특징도 박양하 선수에게는 예외였던 것 같습니다. 드리블 돌파할때의 박력이나 힘이 장난아니었다고 하네요. 감독도 자신의 전술을 무시하고 자기 식대로 플레이하는 박양하 선수가 곱게 보이진 않았겠지만 저렇게 잘하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 ㅋㅋ  한마디로 타고난 플레이메이커였고 축구만화에나 나올법한 선수 였던 것입니다. 한국축구에 플레이메이커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기 이전이었던 걸 감안하면 스스로 타고난 플메의 자질로 학원축구를 요리한 박양하 선수의 쇼크는 대단했으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학원축구에서의 환상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박종환 감독과 함께하는 청대 4강 신화는 고사하고 청대에 호출받아본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박종환 감독의 축구 노선하고 정반대의 길을 걷는 선수가 박양한 선수였을테니까요. 거기다 위에 나온 보헤미안이라는 별명에서 알수 있듯 박양하 선수는 상당히 게으른 선수였고 방랑벽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박종환 감독이 박양하 선수 데리고 있다가는 '내가 죽나 너가 죽나 함판 해보자 ㅆㅂㄹㅁ 야' 하고 전쟁이라도 일어났을 것 같군요 ;ㅅ; 청대 발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양하 선수는 고려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기록을 살펴보며 느끼는거지만 당시 고려대 축구부면 으레 국대에 발탁되는게 예삿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스타플레이어 자질이 농후한 박양하 선수는 청대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대에서도 열외 취급을 당합니다. 박종환식 축구가 청대 4강 신화를 필두로 이후 80년대 한국축구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죠. 역시나 박종환식 축구에서 '계륵' 역할 밖에 할 수 없었던 박양하 선수는 점점 비운의 축구천재의 길을 밟아가기 시작합니다.

고려대 졸업 후 박양하 선수는 대우에 입단하게 됩니다. 80년대 대우는 말 그대로 국가대표 집합소였습니다. 이태호, 변병주, 조광래, 박창선, 정용환, 김풍주, 김판근 마지막 김주성까지 한국축구에서 불멸의 레젼드로 기록될 이름들이 수두룩 빽빽하게 대우 선수진에 포진하고 있었죠. 그 틈바구니에서 박양하 선수는 86년 입단 첫해에 가장 관록할만한 기록을 남기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대우 초대감독이기도 하셨던 장운수 감독님이 박양하 선수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니 꼴리는대로 해봐!' 하고 완전히 필드에서 맘대로 휘젓도록 내버려 둔 것이죠. 이를 통해 박양하 선수는 86시즌 20경기 1골 6도움 기록을 작성합니다. 기록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약간 뛰어난 미드필더 정도로 밖에 안 보이지만 당시 이춘석 이태호 공격진에 넣어주는 환상적인 킬패스의 향연은 말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고 하네요. 특히 이춘석 선수와의 콤비 플레이가 돋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87시즌 대우로얄즈 감독으로 이차만 감독님이 부임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박양하 선수의 방황과 선수단 이탈이 시작되면서 겉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특히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음주행위가 박양하 선수의 보헤미안 기질에 불을 지폇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선발진에서 밀려나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한 박양하 선수는 87시즌 5경기 1도움에 기록만을 남깁니다. 박양하 선수의 추락과 반비례해 팀은 승승장구 87시즌 대우로얄즈는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88시즌 다시 한번의 기회가 박양하 선수에게 오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무리 선수 행실이 안좋다해도 그 천재적인 재능을 썩히기에는 대우 입장에서도 아깝기 그지 없었던 것일테죠. 거기다 88년 아시안컵, 올림픽 때문에 대우의 주전 선수들이 대거 국대로 차출되면서 박양하 선수에게 기회가 온 것 이었죠. 그러나 88시즌의 박양하 선수는 필드를 휘저을때 번뜩이는 센스와 세트 피스 상황에서의 찔러주는 전진패스는 여전했습니다만 뭔가 전성기의 박양하 선수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더군요. 결국 14경기 1골 2도움에 그칩니다. 대우 주전들이 개점휴업인 상황에서 14경기 출장에 그친 것은 상당한 마이너스였을것 같습니다.

결국 89시즌 5경기, 90시즌 5경기 교체 출장이나 교체 아웃을 번갈아하며 감질맛나게 필드에 나서던 박양하 선수는 90시즌을 끝으로 K리그를 은퇴합니다. 다만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국대상비군에 당시 이회택 감독의 호출로 발탁되며 부활의 서곡을 울릴 실날같은 가능성이 보였었습니다만 국대발탁에는 실패하며 결국 은퇴까지 이르게 됩니다. 흥미로운건 당시 국대상비군에 박양하 선수와 같이 새로 발탁된 뉴페이스에 고려대 김병수 선수가 끼어있었다는 점입니다. 80년대 비운의 축구선수의 대표격인 박양하 선수와 90년대 비운의 축구선수 1순위인 김병수 선수가 묘하게 인연을 맺은 것이죠. 축구 기록이란게 이래서 재밌습니다 ^^;

총평하면 박양하 선수는 비운의 축구 선수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썩힌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조지 베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것일테지요. 확실히 요새도 박양하 선수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선수들이 눈에 띄곤 합니다. 뭐 역사는 반복되는거니까요. 흔히 고종수 선수와 비교되는 박양하 선수. 만약에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더 이름이 회자됐을텐데요.. 여러모로 아쉬운 선수입니다.

뭐 어쨋든 박양하 선수는 선수생활을 마친 후
울산 전하초등학교 감독(93~94년)
거제중학교 감독(95~98년)
부산 트레이너(99년)
장승포 초등학교 창단감독(2000년)
최근까지 부경대 감독으로 재임중이셨는데 오늘부로 내셔널리그 등록을 마친 김해FC 초대감독으로 부임하셧습니다.

감독에 재직하면서 길러낸 프로 선수 : 김수형, 조재현 (이상 김해 FC), 박주성 (수원) 여담으로 박주성 선수가 가장 존경하는 은사가 박양하 씨라고 합니다.

by 사냥꾼이너무많다 | 2007/12/20 23:55 | 부산's 레젼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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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홍차도둑 at 2007/12/22 00:08
천재 미드필더로 이름 날리던 선수였지요. 보통 당시 최고의 미드필더들의 특징은 '패싱력'과 '중거리 슈팅력' 이었습니다. 기동력이라 해도 결국은 막말로 말해서 '졸라 뛰댕기며' 수비에서 '뻥!' 질러준 패스 잘 잡는게 다였는데, 드리블러의 시대를 잠깐이나마 열었던 선수죠, 아마 최순호 이전, 이후로 드리블링 능력은 끔찍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지 베스트라 불린것은 좀 보헤미안성격으로 알고 있습니다.

'링커'라 오랫만에 들어보는 좀 오랜 말이군요, 요즘으로 따지면 플레이메이커에 가깝습니다만...^^
사실 어떤 때 보면 옛날 포지션들을 다시 다 끌어올려서 정리해 보고 싶긴 해요. '인너'라는 포지션도 있지요. 요즘으로 따지면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포지션이긴 한데 핸드볼에는 남아있지만 축구에는 사라진 포지션이지요. 노상래가 딱 이 '인너'에 어울리는데, 요즘은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해도 크로아티아의 보반-프로시네츠기가 확립한 '공격형 플레이메이커'와 '공격형 미들'의 개념과 또 배치되기도 하고(유고슬라비아가 청소년대회 우승할때의 포멧이죠. 그러고보니 이때 감독이 세쿨라치치였었던가? 이건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확실한건 당시 MVP인 프로시네츠키는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을 못뛰었는데도 MVP 타먹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죠)...지금 생각해보면 박양하선수의 움직임이 프로시네츠키와 비슷한 면이 많긴 하네요. 하지만 그땐 프로시네츠키는 한참 어린애고, 그런 타입의 선수로는 역시 조지 베스트였으니까요 ^^
Commented by 사냥꾼이너무많다 at 2007/12/22 12:38
프로시네츠키. 말씀 듣고 찾아보니 이 선수도 정말 박양하 선수랑 비슷한 길을 걸었더군요 ;ㅅ; 뭐 물론 프로시네츠키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비운의 축구천재고, 박양하는 K리그에서도 거의 무명으로 묻힌 천재라는 점이 다르지만.. 유고->크로아티아 미들진의 핵심은 언제나 보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a 보반이라는 불세출의 플레이어가 프로시네츠키의 역할을 깍아먹었네요.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거겠죠 ㅜㅡㅜ
Commented by ofo at 2008/01/02 16:30
이 분 김병수보다 더 드리블을 잘했나요? 이분 영상 없나요?
Commented by 사냥꾼이너무많다 at 2008/01/02 19:53
안타깝지만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는 없습니다. 당시 80년대 녹화필름 구하는거 하늘의 별따기에요. 발로 뛰며 자료관 뒤져본다해도 장담 못할껄요?.. 해외영상이나 월드컵 자료야 간혹 있지만 우리나라 국대경기나 특히 K리그 80년대 경기 자료 녹화필름은 드물어요. 차범근 선수시절 전설과도 같이 남은 말레이시아전 인저리 헤트트릭도 녹화 필름 없다 잖아요? ㅡㅅ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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