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6일
K리그 신인왕 계보 part 02
part 01에 이어 90년 부터 신인왕 계보를 총정리해보겠습니다.
90시즌 신인왕 수상자는 송주석 선수입니다. 포지션은 FW로 현대에 입단한 뒤 29경기 출장 3골 7도움을 기록하며 도움 순위 공동 1위에 랭크되고 90시즌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공격수 부문으로 선정됐었죠. 송주석 선수는 90시즌 당시 쟁쟁한 신인왕 후보들이었던 김현석 선수와 하석주 선수를 제치고 신인왕에 등극했습니다. 특히 김현석 선수와는 대학시절부터 김현석 선수는 연세대, 송주석 선수는 고려대를 대표하며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이루다 나란히 현대에 입단, 김현석 선수는 28경기 출장 5득점 3도움을 기록했는데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에서 송주석 선수에게 6표차로 뒤지며 아쉽게 신인왕을 거머쥐지 못했습니다. 하석주 선수도 아주대를 졸업하고 대우에 입단한 첫 해에 24경기 4골 3도움을 기록하며 앞의 두 선수 못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90시즌 신인왕 등극 이후 송주석 선수는 90년부터 99년까지 오직 울산에서만 뛰며 울산의 레젼드라 호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K리그 통산 4000호골의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통산 5개의 레드카드를 받으며 이 부문 최다 기록 선수로도 올라있습니다. 장신의 키로 제공권을 장악하며 팀의 공격루트를 개척하는 역할을 전담했었습니다. 김현석 선수와 함께 울산의 대표 공격수 이자 국내용 공격수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은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91시즌 신인왕은 조우석 선수입니다. 91년은 처음으로 수비수가 신인왕에 등극했던 해로 기록돼있습니다. 여담으로 91 시즌 MVP도 수비수인 정용환 선수가 차지했었는데요. 조우석 선수는 일화에 입단해 37경기 출장 3골 4도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91시즌 이후로 98년 은퇴할때까지 1년에 출장 횟수 평균 20경기 미만에 그치며 기대했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선수로 남아있습니다. 92시즌 13경기 출장, 93시즌에는 11경기 출장에 5장 경고를 기록하는 등 신인왕 징크스를 증명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92시즌 신인왕은 신태용 선수입니다. 92시즌 신인왕 경쟁은 정말 치열했는데요. 그도 그럴것이 홍명보 선수, 1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라버린 임근재 선수, 신태용 선수까지 신인왕 후보로 올라왔으니 말입니다. 결국에는 MVP는 홍명보 선수, 득점왕은 임근재 선수, 신인왕에는 신태용 선수로 나눠먹기(?)를 했습니다. 신인들이 주요 수상을 독식하는 시즌이었던 것이죠. 신태용 선수는 고교시절부터 U-17 대표로 발탁, 87년 제 2회 세계 U-17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해 대한민국을 8강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등 초특급 신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MF로 일화에 입단했었습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올림픽 대표 차출로 18경기만 뛰고도 7골 4도움을 올리는 환상적인 기록을 작성하며 신인왕 타이틀을 가져갑니다. 이후의 활약은 그야말로 성남의 레젼드를 넘어 K리그의 독보적인 레젼드라는 최고의 자리에 신태용 선수를 앉혀놓게됩니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요? ;; 성남의 마지막 초유의 무개념 짓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텐데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네요.
93시즌 신인왕은 정광석 선수입니다. 91시즌에 이어 수비수가 신인왕을 탄 시즌이 93시즌이었습니다. 대우에 입단해 26경기 출장 1도움 경고 4, 퇴장 1번을 기록했습니다. 정광석 선수는 위의 신태용 선수와 함께 U-17 세계 청대 대표로 발탁되었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93년 당시 신인으로는 유상철, 이임생, 조준호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모두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했기에 상당한 기대를 받았을 껍니다. 그러나 94시즌 14경기 출장 1득점에 그치며 2년차 징크스에 빠지는 듯 했고 대우는 정광석 선수의 군입대를 결정합니다. 선수로서 가장 만개해야할 시기에 군복무는 상당한 치명타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결국 97년 부산으로 복귀한 정광석 선수는 이듬해 98년 은퇴하면서 짧은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합니다. 리그 통산 79경기 출장 3골 2도움. 우연인지는 모르나 2명뿐이 DF 신인왕 모두 K리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데 실패했군요. 은퇴 후 최근 소식은 용인 FC 중등부 코치로 있으시다가 현재는 전남 유소년 코치로 선임되셨다고 들었습니다.
94시즌 신인왕은 최용수 선수입니다. LG의 FW로 입단한 첫 해 35경기 출장 10골 7도움을 기록했습니다. 정규리그 득점 순위는 9골로 5위, 도움은 3위를 기록했었죠. 95,96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플레이로 안양의 주 공격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최용수 선수의 진정한 전성기는 97,98 안양을 떠나 군입대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군입대 후 클럽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대표로 자유롭게 차출되면서 98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일약 대한민국 대표 공격수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던거죠. 국대에서뿐만 아니라 군복무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99시즌 27경기 14골 4도움을 기록한데 이어 2000년 시즌에는 안양의 K리그 우승을 이끄는 주역으로 K리그 선수로서의 기록에 화려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뒤에는 J리그로 건너가 J리그를 평정해버렸죠. 1시즌당 평균 25골을 넣는 초특급 활약으로 J리그 연봉 TOP 5 안에 들어갔고요. 아직도 J리그 스카우터들이 한국 선수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원흉(?)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GS 코치라서 역시 에러.
95시즌 신인왕은 노상래 선수입니다. 전남의 FW로 입단해 신인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차지했었죠. 정규리그 26경기 출장 15골 5도움 득점순위 1위, 도움순위 공동 4위를 기록했습니다. 실업팀인 주택은행에서 뛰다 전남에 입단한 중고(?)신인, 26살의 신인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신인은 신인이었습니다. 당시 95년 신인으로는 윤정환 선수가 있었습니다만 올대 차출로 클럽에 쏟을 여력이 없었죠. 하지만 당시 노상래 선수보다 윤정환 선수가 몇갑절은 유명했었더라는 ;ㅅ; 96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없이 13골 7도움을 기록하며 승승장구 96 아시안컵에 발탁된것 까지는 좋았는데 인도네시아전에서 부상 당하면서 이란에게 2:6 대패 당하는걸 지켜봐야했었죠. 국대와는 그다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노상래 선수에게 2년차 징크스는 없었지만 3년차 징크스(?)에 걸려 넘어지며 97시즌에는 17경기 출장에 그칩니다. 그래도 7골 기록. 이후 2001년까지 전남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이자 캐논슛터의 계보를 잇는 호쾌한 중거리 슛팅으로 광양구장의 만원관중몰이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2002년 시즌 노상래 선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자 전남은 이 프렌차이즈 스타를 방출해버리고 맙니다. 이미 나이도 은퇴기로에 접어든 상황이었지만 노상래 선수는 신생구단 대구로 입단해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불태웁니다. 결국 기어이 K리그 통산 50-50의 대기록을 작성하시고 2004년 은퇴하게 됩니다. 전남 프론트진이 정말 무개념 짓을 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지금은 김희태 축구센터 코치로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96시즌 신인왕부터 드디어 현역 선수가 나옵니다. 박건하 선수죠. 뭐 플레잉 코치니까 코치나 다름 없습니다만 선수등록은 돼있으니까요. 95년 이랜드에서 1년을 뛰면서 가볍게 실업축구를 평정하고 수원에 FW로 입단, 28경기 11골 6도움으로 득점 순위 6위, 도움 순위 공동 7위에 랭크되었고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박건하 선수가 신인왕에 등극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96년에는 각종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외국인 전설 라데 선수의 1시즌 10-10 달성 기록도 나오고요, 신태용 선수는 두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득점왕에 등극 92년 신인왕 95년 MVP에 이어 96년 득점왕 까지 통산 개인 타이틀 3개를 독식하는 기록을 세웁니다. 앞서 이흥실 선수가 80년대 신인왕 MVP 도움왕 독식한 것에 이은 대기록이었습니다. 덧붙여 신태용 선수는 5시즌 연속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되는 동시에 천안 일화를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 아시안수퍼컵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수로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박건하 선수 소개가 아니라 신태용 선수 찬양으로 도배되는 것 같군요 ;ㅅ; 진정하고.. 박건하 선수도 2년차 징크스에 흔들렸는데요. 97시즌 17경기 2골 4도움에 그쳤고 그 여파로 98시즌까지 22경기 2골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박건하 선수는 화려하게 99시즌 부활하며 수원의 첫 우승을 견인합니다. 39경기 12골 6도움을 기록했죠. 이후에도 팀의 주 득점원은 아니었지만 결코 없어선 안될 공격수로 수원에서 활약합니다. 수원이 워낙 외국인 공격진의 면면이 화려했기에 (샤샤,비탈리,산드로 ㅎㄷㄷ) 박건하 선수의 꾸준한 출장 기록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2002시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하는데 성공한 박건하 선수는 이후로도 꾸준히 경기 출장을 이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1년동안 수원을 위해 뛰었고 앞으로도 수원을 위해 뛸 수원의 레젼드 no.01
부산으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97시즌의 신인왕은 신진원 선수입니다. 사상 첫 시민구단을 표방한 대전시티즌에 입단한 MF로 대전이 첫 시즌 대전이 주체할 수 없는 하위권의 나락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97시즌 32경기 출장 6득점 1도움 특히 정규리그에서만 5골을 성공시키며 정규리그 득점순위 5위에 랭크되어 신인왕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후 98시즌에는 32경기 출장 8골 3도움으로 대전의 미들진을 책임지는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합니다. 불행히도 99년 치명적인 부상으로 7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 여파로 2000년에도 리그 26경기 출장 중 풀타임 소화는 9경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6도움을 올리며 도움순위 6위에 랭크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결국 2001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신진원 선수는 전남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대전이 재계약 하기엔 부담이 컸거니와 풀타임 출전도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예측대로 전남으로 이적한 신진원 선수는 26경기 출장 중 6경기만을 풀타임으로 소화하는데 그쳤습니다. 2골 1도움으로 공격 포인트도 기대이하였죠. 결국 2002년 8경기 출장을 끝으로 전남에서 다시 대전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전 복귀 이후도 예전의 전성기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2004년 시즌을 끝으로 일찍 프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98시즌 신인왕은 이동국 선수입니다. 에휴.. 괜히 한숨이 나오네요. 98년은 K리그 황금기였죠. 당시 신인왕 경쟁도 황금기(?)였습니다. 신인왕 후보부터 화려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안정환 박성배 이동국 백승철. 백승철 선수도 정말 비운의 선수지만 이때만 해도 포항의 보배같은 존재였었죠. 전설로 남은 울산과의 플레이오프 타임 휘슬 불기 직전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부터 시작해서 10골을 득점하며 득점순위 3위에 랭크되었고 박성배 선수도 전북에서 10골을 득점 다만 출전경기수가 백승철 선수보다 적기 때문에 득점순위 2위를 차지했었습니다. 이동국 선수는 15경기 출장 7골 2도움이었지만 청소년대표 차출로 공백이 있음을 감안했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동국 선수의 인기가 막강했기에 기자단 투표를 통해 이동국 선수가 신인왕의 영예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안정환 선수는 17경기 5골 2도움이었습니다. 신인왕 이후 이동국 선수의 인생역정이야 더 써봐야 손만 아플뿐이지 다들 잘 아실테니 딱히 쓸 말도 없군요 ;; 다만 2001년 베르더브레멘 임대 후 첫 경기. 당시 자신의 앞길에 장미빛 미래만을 꿈꾸며 행복하게 필드를 뛰었던 이동국 선수의 모습을 지금 다시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이동국을 보고 함께 웃고 울었으며 언젠가는 비상하기를 바라며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팬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동국 선수 본인에게는 더더욱 그럴테구요.
99시즌 신인왕은 이성재 선수입니다. 부천의 화려했던 영광과 뒤이어 드리운 몰락의 그림자를 모두 겪으며 사라진 선수죠. 부천에서 FW로 데뷔 31경기 출장 9골 2도움을 기록했습니다. 독특한건 단 1경기도 풀타임을 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리그 통산 139경기 출장 중 19경기만 풀타임 출장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열거된 신인왕 중 제일 기록이 처지는 편이긴 합니다. 99시즌 당시 신인왕 후보가 이렇다할만한 선수가 없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당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던 선수는 진순진, 성한수, 김경일, 임중용 정도였습니다. 모두 부상으로 제대로 경기 출장도 못해본 선수들이었죠. 그랬기에 이성재 선수가 거저먹기로 신인왕에 올랐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선수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부천팬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선수에는 반드시 이성재 선수가 들어가니까요.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실력을 갖췄지만 지속시간이 짧았다고 해두는게 맞을 겁니다. 2000년 시즌에도 39경기 출장 2경기만을 풀타임으로 뛰었으며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부천팬들의 기대에 보답합니다. 그러나 2001년 9경기 출장 1골에 그치며 부진했고 2002년에는 15경기 1골 2003년에도 20경기 1골로 실망스러운 기록만을 남겼습니다. 이 3년간의 이성재 선수의 하향세는 부천 프론트 진의 자폭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막장 행보와도 일맥상통하죠. 결국 최후의 일격처럼 부천 프론트 진은 이성재를 방출시키고 이성재 선수는 2004년 부산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부산에서도 리그 무득점, 컵대회에서 10경기 출장에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부활의 찬가를 울릴 것이라 기대했었습니다만 부산에서 1시즌만에 방출 당합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부천이 사라졌습니다. 울산에서 잠깐 뛰었지만 없느니만 못한 기록이기에 빼겠습니다.
휴 일단 90년대까지는 마쳤네요 헥헥 ;;ㅅ;;
90시즌 신인왕 수상자는 송주석 선수입니다. 포지션은 FW로 현대에 입단한 뒤 29경기 출장 3골 7도움을 기록하며 도움 순위 공동 1위에 랭크되고 90시즌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공격수 부문으로 선정됐었죠. 송주석 선수는 90시즌 당시 쟁쟁한 신인왕 후보들이었던 김현석 선수와 하석주 선수를 제치고 신인왕에 등극했습니다. 특히 김현석 선수와는 대학시절부터 김현석 선수는 연세대, 송주석 선수는 고려대를 대표하며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이루다 나란히 현대에 입단, 김현석 선수는 28경기 출장 5득점 3도움을 기록했는데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에서 송주석 선수에게 6표차로 뒤지며 아쉽게 신인왕을 거머쥐지 못했습니다. 하석주 선수도 아주대를 졸업하고 대우에 입단한 첫 해에 24경기 4골 3도움을 기록하며 앞의 두 선수 못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90시즌 신인왕 등극 이후 송주석 선수는 90년부터 99년까지 오직 울산에서만 뛰며 울산의 레젼드라 호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K리그 통산 4000호골의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통산 5개의 레드카드를 받으며 이 부문 최다 기록 선수로도 올라있습니다. 장신의 키로 제공권을 장악하며 팀의 공격루트를 개척하는 역할을 전담했었습니다. 김현석 선수와 함께 울산의 대표 공격수 이자 국내용 공격수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은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91시즌 신인왕은 조우석 선수입니다. 91년은 처음으로 수비수가 신인왕에 등극했던 해로 기록돼있습니다. 여담으로 91 시즌 MVP도 수비수인 정용환 선수가 차지했었는데요. 조우석 선수는 일화에 입단해 37경기 출장 3골 4도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91시즌 이후로 98년 은퇴할때까지 1년에 출장 횟수 평균 20경기 미만에 그치며 기대했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선수로 남아있습니다. 92시즌 13경기 출장, 93시즌에는 11경기 출장에 5장 경고를 기록하는 등 신인왕 징크스를 증명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92시즌 신인왕은 신태용 선수입니다. 92시즌 신인왕 경쟁은 정말 치열했는데요. 그도 그럴것이 홍명보 선수, 1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라버린 임근재 선수, 신태용 선수까지 신인왕 후보로 올라왔으니 말입니다. 결국에는 MVP는 홍명보 선수, 득점왕은 임근재 선수, 신인왕에는 신태용 선수로 나눠먹기(?)를 했습니다. 신인들이 주요 수상을 독식하는 시즌이었던 것이죠. 신태용 선수는 고교시절부터 U-17 대표로 발탁, 87년 제 2회 세계 U-17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해 대한민국을 8강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등 초특급 신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MF로 일화에 입단했었습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올림픽 대표 차출로 18경기만 뛰고도 7골 4도움을 올리는 환상적인 기록을 작성하며 신인왕 타이틀을 가져갑니다. 이후의 활약은 그야말로 성남의 레젼드를 넘어 K리그의 독보적인 레젼드라는 최고의 자리에 신태용 선수를 앉혀놓게됩니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요? ;; 성남의 마지막 초유의 무개념 짓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텐데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네요.
93시즌 신인왕은 정광석 선수입니다. 91시즌에 이어 수비수가 신인왕을 탄 시즌이 93시즌이었습니다. 대우에 입단해 26경기 출장 1도움 경고 4, 퇴장 1번을 기록했습니다. 정광석 선수는 위의 신태용 선수와 함께 U-17 세계 청대 대표로 발탁되었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93년 당시 신인으로는 유상철, 이임생, 조준호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모두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했기에 상당한 기대를 받았을 껍니다. 그러나 94시즌 14경기 출장 1득점에 그치며 2년차 징크스에 빠지는 듯 했고 대우는 정광석 선수의 군입대를 결정합니다. 선수로서 가장 만개해야할 시기에 군복무는 상당한 치명타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결국 97년 부산으로 복귀한 정광석 선수는 이듬해 98년 은퇴하면서 짧은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합니다. 리그 통산 79경기 출장 3골 2도움. 우연인지는 모르나 2명뿐이 DF 신인왕 모두 K리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데 실패했군요. 은퇴 후 최근 소식은 용인 FC 중등부 코치로 있으시다가 현재는 전남 유소년 코치로 선임되셨다고 들었습니다.
94시즌 신인왕은 최용수 선수입니다. LG의 FW로 입단한 첫 해 35경기 출장 10골 7도움을 기록했습니다. 정규리그 득점 순위는 9골로 5위, 도움은 3위를 기록했었죠. 95,96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플레이로 안양의 주 공격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최용수 선수의 진정한 전성기는 97,98 안양을 떠나 군입대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군입대 후 클럽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대표로 자유롭게 차출되면서 98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일약 대한민국 대표 공격수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던거죠. 국대에서뿐만 아니라 군복무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99시즌 27경기 14골 4도움을 기록한데 이어 2000년 시즌에는 안양의 K리그 우승을 이끄는 주역으로 K리그 선수로서의 기록에 화려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뒤에는 J리그로 건너가 J리그를 평정해버렸죠. 1시즌당 평균 25골을 넣는 초특급 활약으로 J리그 연봉 TOP 5 안에 들어갔고요. 아직도 J리그 스카우터들이 한국 선수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원흉(?)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GS 코치라서 역시 에러.
95시즌 신인왕은 노상래 선수입니다. 전남의 FW로 입단해 신인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차지했었죠. 정규리그 26경기 출장 15골 5도움 득점순위 1위, 도움순위 공동 4위를 기록했습니다. 실업팀인 주택은행에서 뛰다 전남에 입단한 중고(?)신인, 26살의 신인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신인은 신인이었습니다. 당시 95년 신인으로는 윤정환 선수가 있었습니다만 올대 차출로 클럽에 쏟을 여력이 없었죠. 하지만 당시 노상래 선수보다 윤정환 선수가 몇갑절은 유명했었더라는 ;ㅅ; 96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없이 13골 7도움을 기록하며 승승장구 96 아시안컵에 발탁된것 까지는 좋았는데 인도네시아전에서 부상 당하면서 이란에게 2:6 대패 당하는걸 지켜봐야했었죠. 국대와는 그다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노상래 선수에게 2년차 징크스는 없었지만 3년차 징크스(?)에 걸려 넘어지며 97시즌에는 17경기 출장에 그칩니다. 그래도 7골 기록. 이후 2001년까지 전남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이자 캐논슛터의 계보를 잇는 호쾌한 중거리 슛팅으로 광양구장의 만원관중몰이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2002년 시즌 노상래 선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자 전남은 이 프렌차이즈 스타를 방출해버리고 맙니다. 이미 나이도 은퇴기로에 접어든 상황이었지만 노상래 선수는 신생구단 대구로 입단해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불태웁니다. 결국 기어이 K리그 통산 50-50의 대기록을 작성하시고 2004년 은퇴하게 됩니다. 전남 프론트진이 정말 무개념 짓을 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지금은 김희태 축구센터 코치로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96시즌 신인왕부터 드디어 현역 선수가 나옵니다. 박건하 선수죠. 뭐 플레잉 코치니까 코치나 다름 없습니다만 선수등록은 돼있으니까요. 95년 이랜드에서 1년을 뛰면서 가볍게 실업축구를 평정하고 수원에 FW로 입단, 28경기 11골 6도움으로 득점 순위 6위, 도움 순위 공동 7위에 랭크되었고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박건하 선수가 신인왕에 등극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96년에는 각종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외국인 전설 라데 선수의 1시즌 10-10 달성 기록도 나오고요, 신태용 선수는 두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득점왕에 등극 92년 신인왕 95년 MVP에 이어 96년 득점왕 까지 통산 개인 타이틀 3개를 독식하는 기록을 세웁니다. 앞서 이흥실 선수가 80년대 신인왕 MVP 도움왕 독식한 것에 이은 대기록이었습니다. 덧붙여 신태용 선수는 5시즌 연속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되는 동시에 천안 일화를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 아시안수퍼컵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수로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박건하 선수 소개가 아니라 신태용 선수 찬양으로 도배되는 것 같군요 ;ㅅ; 진정하고.. 박건하 선수도 2년차 징크스에 흔들렸는데요. 97시즌 17경기 2골 4도움에 그쳤고 그 여파로 98시즌까지 22경기 2골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박건하 선수는 화려하게 99시즌 부활하며 수원의 첫 우승을 견인합니다. 39경기 12골 6도움을 기록했죠. 이후에도 팀의 주 득점원은 아니었지만 결코 없어선 안될 공격수로 수원에서 활약합니다. 수원이 워낙 외국인 공격진의 면면이 화려했기에 (샤샤,비탈리,산드로 ㅎㄷㄷ) 박건하 선수의 꾸준한 출장 기록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2002시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하는데 성공한 박건하 선수는 이후로도 꾸준히 경기 출장을 이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1년동안 수원을 위해 뛰었고 앞으로도 수원을 위해 뛸 수원의 레젼드 no.01
부산으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97시즌의 신인왕은 신진원 선수입니다. 사상 첫 시민구단을 표방한 대전시티즌에 입단한 MF로 대전이 첫 시즌 대전이 주체할 수 없는 하위권의 나락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97시즌 32경기 출장 6득점 1도움 특히 정규리그에서만 5골을 성공시키며 정규리그 득점순위 5위에 랭크되어 신인왕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후 98시즌에는 32경기 출장 8골 3도움으로 대전의 미들진을 책임지는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합니다. 불행히도 99년 치명적인 부상으로 7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 여파로 2000년에도 리그 26경기 출장 중 풀타임 소화는 9경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6도움을 올리며 도움순위 6위에 랭크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결국 2001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신진원 선수는 전남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대전이 재계약 하기엔 부담이 컸거니와 풀타임 출전도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예측대로 전남으로 이적한 신진원 선수는 26경기 출장 중 6경기만을 풀타임으로 소화하는데 그쳤습니다. 2골 1도움으로 공격 포인트도 기대이하였죠. 결국 2002년 8경기 출장을 끝으로 전남에서 다시 대전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전 복귀 이후도 예전의 전성기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2004년 시즌을 끝으로 일찍 프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98시즌 신인왕은 이동국 선수입니다. 에휴.. 괜히 한숨이 나오네요. 98년은 K리그 황금기였죠. 당시 신인왕 경쟁도 황금기(?)였습니다. 신인왕 후보부터 화려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안정환 박성배 이동국 백승철. 백승철 선수도 정말 비운의 선수지만 이때만 해도 포항의 보배같은 존재였었죠. 전설로 남은 울산과의 플레이오프 타임 휘슬 불기 직전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부터 시작해서 10골을 득점하며 득점순위 3위에 랭크되었고 박성배 선수도 전북에서 10골을 득점 다만 출전경기수가 백승철 선수보다 적기 때문에 득점순위 2위를 차지했었습니다. 이동국 선수는 15경기 출장 7골 2도움이었지만 청소년대표 차출로 공백이 있음을 감안했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동국 선수의 인기가 막강했기에 기자단 투표를 통해 이동국 선수가 신인왕의 영예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안정환 선수는 17경기 5골 2도움이었습니다. 신인왕 이후 이동국 선수의 인생역정이야 더 써봐야 손만 아플뿐이지 다들 잘 아실테니 딱히 쓸 말도 없군요 ;; 다만 2001년 베르더브레멘 임대 후 첫 경기. 당시 자신의 앞길에 장미빛 미래만을 꿈꾸며 행복하게 필드를 뛰었던 이동국 선수의 모습을 지금 다시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이동국을 보고 함께 웃고 울었으며 언젠가는 비상하기를 바라며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팬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동국 선수 본인에게는 더더욱 그럴테구요.
99시즌 신인왕은 이성재 선수입니다. 부천의 화려했던 영광과 뒤이어 드리운 몰락의 그림자를 모두 겪으며 사라진 선수죠. 부천에서 FW로 데뷔 31경기 출장 9골 2도움을 기록했습니다. 독특한건 단 1경기도 풀타임을 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리그 통산 139경기 출장 중 19경기만 풀타임 출장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열거된 신인왕 중 제일 기록이 처지는 편이긴 합니다. 99시즌 당시 신인왕 후보가 이렇다할만한 선수가 없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당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던 선수는 진순진, 성한수, 김경일, 임중용 정도였습니다. 모두 부상으로 제대로 경기 출장도 못해본 선수들이었죠. 그랬기에 이성재 선수가 거저먹기로 신인왕에 올랐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선수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부천팬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선수에는 반드시 이성재 선수가 들어가니까요.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실력을 갖췄지만 지속시간이 짧았다고 해두는게 맞을 겁니다. 2000년 시즌에도 39경기 출장 2경기만을 풀타임으로 뛰었으며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부천팬들의 기대에 보답합니다. 그러나 2001년 9경기 출장 1골에 그치며 부진했고 2002년에는 15경기 1골 2003년에도 20경기 1골로 실망스러운 기록만을 남겼습니다. 이 3년간의 이성재 선수의 하향세는 부천 프론트 진의 자폭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막장 행보와도 일맥상통하죠. 결국 최후의 일격처럼 부천 프론트 진은 이성재를 방출시키고 이성재 선수는 2004년 부산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부산에서도 리그 무득점, 컵대회에서 10경기 출장에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부활의 찬가를 울릴 것이라 기대했었습니다만 부산에서 1시즌만에 방출 당합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부천이 사라졌습니다. 울산에서 잠깐 뛰었지만 없느니만 못한 기록이기에 빼겠습니다.
휴 일단 90년대까지는 마쳤네요 헥헥 ;;ㅅ;;
# by | 2007/11/26 19:08 | K리그에 관련된건 뭐든지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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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환 자체도 긴 패스를 넣을때 따라잡아주는 선수를 좋아했고 당시 이성재선수 스타일도 고대때에 비슷햇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조윤환감독은 이성재에게 시킨게 '전반만 뛴다고 생각해도 좋으니 풀파워로 뛰어라'라는 지령을 내립니다(이건 조윤환, 최윤겸 두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지요)
그렇게 해서 이성재가 교체로 나가면 이원식이 결정짓는 스타일은 한때 부천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상대편으로선 죽을 맛이었을겁니다. 뻔히 알면서도 이성재를 놔두자니 이성재가 골을 못넣는것도 아니고...
이러다보니 부천의 이성재 전반, 이원식 후반이라는 카드는 한때 필승카드로 통하기도 했죠.
당시 진순진, 김경일은 거품이 많았고 성한수하고 끝까지 신인왕경쟁을 하다가 성한수가 시즌 막판 부상으로 물러나면서 어부지리로 얻은것이라 봐야 그해이 신인왕을 정확히 말할수 있다 봅니다. 사실 제가 볼 때엔 성한수가 '시티헌터'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대전의 진격에 앞장섰던걸 생각하면 그 두꺼운 미드필드진(이때 부천의 최강미들이 완성된 해죠. 이건 국대로 그냥 보내도 된다는 농담 나왔을 정도였고 K리그 사상 작년과 올해의 포항을 제외하면 이런 아름다운 패싱플레이팀이 10년간 없었습니다.)의 지원을 받은 이성재를 비교한다면 당연 성한수의 손을 들어줘야죠. 이때도 그렇고 앞서 91시즌의 조우석의 경우도 보면 뭐랄까요 '기록만 앞서면 된다'인 케이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91년의 조우석보다는 후보인 신흥기가 한수 위였다고 보거든요 실제 경기내용도 보면 '공격포인트만 적었지' 팀 공헌도는 신흥기가 위였죠.
이성재의 경우 2001년부터의 하락은 부천의 하락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부천 미드필드진의 변화와 함께 몰락이 된것이니만큼 정확히 말하자면 부천의 1990년대 후반의 '니폼니쉬 시대'에 최적화된 선수였던 것이기도 하죠. 말하신 3년간의 하향세는 부천축구의 변화를 보면 이성재가 미드필드진의 지원이 없으면 힘들다는걸 증명하는 케이스입니다. 부산에서도 2004년 컵대회때의 미드필드들의 활약을 생각하시면 쉽게 그 모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
그때 부산도 피해를 본 면이 있는게 그 당시 부산이 김정혁을 잡기 위해 2:3 트레이드라는 전대미문의 트레이드를 강행했었죠. 당시 1992 시즌의 경우 신인들이 너무 슈퍼신인들이 많았어요.
김정혁 뿐 아니라 서정원, 조정현, 등등...당시 신인들로만 팀 꾸려도 국대팀 나올수 있다는 이야기 나올 정도의 선수들이 줄줄이 있었으니까요.(올림픽팀의 주축들이기도 했죠)
그러고보니 이때 대학 최대어들의 문제가 '고질적인 부상' 이었고 결국 이건 프로입단 뒤 발목을 아주 잡아버리죠. 김정혁이 바로 그 케이스로 결국 나중에야 빛을 보지만 대학때의 실력을 생각하자면 너무 아쉬운 선수입니다. 김호 감독이 1993년의 다이너스티 컵 등에서 김정혁을 괜히 공격선봉에 세운게 아니거든요.
농담 아니라 대학때엔 정말 소속팀을 '원맨팀'으로 만들면서 대회 우승까지 차지할 정도였으니...그거 보면서 저 입을 쩍 벌렸습니다. '최순호와 김주성을 합쳐놓은 저 사람 누구야?' 하고 말이죠.
그러나 이해의 신인왕뿐 아니라 일화의 선수 채가기는 그야말로 스카우팅의 걸작이었습니다. 그 한번의 스카우팅이 일화의 10년을 결정지었으니까요. 박종환 감독의 선수사용중 최고의 예술이었지요. 신태용, 한정국, 박남렬 이 셋은 진짜 기가막힌 캐스팅이었으니까요. 제가 볼때도 1992년만큼 신인왕 후보급이 대어를 넘은 상어들이 득시글한 해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 대표적인게 동대문에서 벌어진 대전과의 경기에서 대전이 2-0으로 앞서나가면서 이기기 직전의 분위기였는데 윤정환의 매직에 걸려 2분만에 두골을 허용하면서(이때 윤정환이 한골은 확실히 넣었고 한골은 어시스트였을 겁니다) 미쳐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날이 윤정환의 생일...-ㅅ-
그런데 노상래에 대해서는 저도 이견이 있는게 노상래는 스트라이커로 보기엔 애매한 선수였습니다. 그렇다고 확실한 쉐도우 스트라이커도 아니고, 제가 볼 땐 1970년대쯤에 존재하고 현재 핸드볼에도 포지션이 남아있는 '인너' 라는 포지션이 노상래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슈팅의 경우 기존의 한국 선수와는 다른 모습인데 템포만 빠를뿐 아니라 스피드와 강도가 겸비된 것이었죠. 전 그래서 아는 전남팬들에게 당시 노상래의 슛을 '때린다' 가 아니라 '쌔린다' 라는 표현까지 썼죠. 묵직하게 나가는게 아닌 스피드하게 충격을 준다고 해서 말이죠 ^^
노상래의 부진은 노상래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스트라이커도 아닌 어정쩡한 자신의 위치라는 것은 큰 문제였죠. 그래서 공격전술이 자신에게 맞춰진 데뷔후 2년동안은 활약이 가능했지만 데뷔 3년차부터가 바로 전남의 용병이 엄청난 공격수들이 들어오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노상래의 존재가치가 애매해진거죠. 노상래의 득점력은 인정하지만 노상래를 넣으면 팀 발란스가 깨져버리는 현상인거죠. 그런 상황에서는 호나우두라도 방출위기에 몰립니다 어쩔수가 없지요...-ㅅ-
결국은 노상래 선수의 그러한 방출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어요...
노상래 선수에 대한 개인적인 안좋은 면도 있으니 아는 분들은 그의 방출을 보면서 아주 속시원할지도 모릅니다 ㅎㅎ
그리고 95, 96 신인왕들은 정말 '이 인간들을 신인왕으로 봐야 하나?' 할 정도로 중고신인이라서 ㅎㅎ
그해 제가 스포츠 서울가서 기자들을 부추켰거든요 당시 전반기 끝나자 라데하고 조셉(부천)이 엄청난 득점과 어시스트 행진을 벌인 겁니다. 전반기에 이미 5-5 를 넘어섰거든요. 그중 라데는 이미 골이 두자리수 직전이구...그래서 당시 김덕기 스포츠서울 축구팀 부장님에게 부추켰죠 "아직 한국 프로축구에서 그런 기록 없잖습니까? 야구도 20-20이다 30-30이다 있는데 축구라 해서 그런 클럽 없으리라는 법 없잖아요? 언론이면 이런거 만들어야 할거 아닙니까~" 그러자마자 김덕기 부장님이 "그거 말 된다. 어서 조사해보자!" 하고 처음으로 10-10 클럽에 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 뒤부턴 그 10-10이 언론에 많이 나오면서 이슈가 된거죠. 제가 아니었으면 그 10-10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루어 졌다 하더라도 이렇게 쓰시지 않았을 거라 봅니다.
왜냐면 몇년전에 김도훈도 두자리-두자리 성공했거든요. 그런데 언론 어디서도 안썼죠(하나 있습니다. 제가 다음에 글 기고하고 있을 때 김도훈의 보이지 않는 왕관 운운하면서 썼거든요 플라마에도 그 글 있을 겁니다) 이게 한국 언론의 조깥은 한계입니다.
거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 선수들을 빨리빨리 써먹어야 하다보니 선수들이 부상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도 출격...결국은 단명하는거죠. 박지성도 사실상 이번 시즌 절반 이상 버린거나 다름없지만 우리나라였으면 조낸 돌려댔을겁니다. 잠깐은 성적에서 반짝 효과를 봤겠지만 단명으로 가는거구요.
비근한예로 농구황제 조던도 불스 들어가고 두번째 해던가 세번재 해던가에 부상으로 아예 한시즌을 쉬었죠 한국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러진 선수들을 생각하자면 정말 눈물나는군요 T_T